[강태광의 행복칼럼] 정율성 기념공원과 이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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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광의 행복칼럼] 정율성 기념공원과 이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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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 선생의 기념공원 건립을 두고 광주시장과 보훈부 장관이 설전을 벌인다는 뉴스가 들린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정율성을 듣고 그를 추적해 본다. 독립운동에 동참했고 음악적 재능이 탁월했던 정율성의 기념공원 건립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북한과 중국(중공)에서 보낸 말년 행적 때문이다. 

   

위키백과사전은 해방 이후 정율성을 이렇게 소개한다. 정율성은 194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해방을 얻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으로 귀국해 조선인민군 구락부부장, 조선인민군 협주단 단장, 조선음악대학 작곡부 부장으로 일했다. 그는 해방 후 북한 정권 아래서 호의호식했다.

   

1950년에 중공 국적을 취득한 정율성은 한국전쟁에 중공군으로 참전했고, 중공군 사기진작을 위한 군가 작곡을 했단다. 그는 북한과 중공에서 공산당 활동을 했고, 한국군대에 대항한 적군이었다. 그런데 이런 전범을 왜 대한민국에서 추모하고 그를 기리는 공원 건립을 해야 할까? 이해가 쉽지 않다. 

   

조선시대 말엽에 명석한 관료가 있었다. 20대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었고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30대 초에 육영공원에 입학해 영어를 배웠다. 그는 영어가 능통해 1888년 주미 외교관으로 파견되었고 주미공사로 근무했다. 그는 문교부 장관격인 학부대신이 되어 선진교육의 기초를 닦았다. 그는 성균관에 미국식 대학제도 도입과 초등교육 의무화를 시행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 그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주도했다. 오직 조국을 위한 결정들이었다. 그는 독립협회 결성을 주도했고, 독립협회 창설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제2대 독립협회 회장이 되었고 당시 거액인 100원을 기부해서 독립문을 세웠다. 

   

그런데, 이 사람의 기념비는 없다. 앞으로도 그의 행적을 기념하기는 쉽지 않다. 이 사람이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중요한 서류들에 도장을 찍었던 이완용이다. 그래서 역사는 그를 매국노라고 부른다. 당시 이완용은 일본에게 나라를 맡기는 것이 조선왕조를 지키는 것이라고 강변했다고 한다. 그의 진심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이런 천박한 시대이해와 역사의식으로 매국노가 되었다.

   

이완용은 술과 여자를 모르는 모범생이었고 애국자요 충신이었다. 그의 독립협회 창설 기념연설은 애국심과 혜안이 담긴 감동적인 명문(名文)이다. 이완용은 친미파, 친러파 그리고 친일로 변신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미국이 부상할 것을 알고 ‘친미’를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매국노다. 

   

이완용은 서예, 영어 그리고 교육 등 여러 분야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친일 행각 이전까지 이완용은 나름대로 조국을 생각하는 애국자요 충신이었다. 그는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충신에서 간신, 애국자에서 매국노로 옮겨간 불행한 사람이다. 그래서 탁월한 업적과 공로가 있어도 그는 매국노로 평가받는다.

   

정율성 기념공원 건립을 말하는 사람은 그의 독립운동과 음악 재능을 높이 평가한 나머지 그의 행적을 간과하는 듯하다. 천박한 역사의식이다. 그는 전범의 일원이다. 이미 정율성 기념음악회도 있고 생가 보존도 하고 있단다. 역사 왜곡이다. 왜곡된 역사관은 왜곡된 역사를 만든다. 이완용 기념공원도 안되는 것처럼 정율성 기념공원도 안된다. 바른 역사의 징검다리를 놓는 것은 다음 세대를 위한 오늘의 책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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