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광의 행복칼럼] 폄하 논란과 나의 인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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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광의 행복칼럼] 폄하 논란과 나의 인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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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 혁신위원장 노인폄하 발언이 연일 뉴스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폄하’라는 말이 우리사회에 중요한 논쟁거리라는 사실이 생경하다. 안타까운 것은 당사자의 해명이 또 다른 문제를 낳고, 또 다른 구설수로 이어지고, 또 다른 폄하 발언으로 이어지고 있다. 내가 보수주의자라서가 아니라 좋게 봐 줄래도 좋게 봐 줄 여지가 별로 없어 보인다. 

   

문제가 된 혁신위원장의 노인폄하 발언에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더 안타까운 것은 그녀는 주변 모두를 폄하하는 발언을 토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되지 않는 그녀의 발언에 ‘폄하’가 너무 많다. 노인폄하는 물론이요, 대학생 폄하, 의원 폄하, 대통령 폄하 그리고 교수 폄하, 그야말로 줄줄이 폄하이다. 

   

평소에 잘 사용하지도 않는 ‘폄하’라는 말이 이렇게도 인구(人口)에 회자(膾炙)하는 말이 되었다. ‘폄하’는 국어사전에서 “가치를 깎아내림”이라고 정의한다. 유사한 단어로 ‘폄훼’가 있는데 이는 “가치를 깎아내려 헐뜯음”이다. 두 단어가 모두 ‘남의 일이나 삶을 깎아내리고 비판하는 언어’다. 사용하기를 자제해야 할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언어다. 

   

일면 혁신위원장은 비난받아 마땅한 실수를 연발했다. 그러나, 그녀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그녀를 무참하게 헐뜯는다. 안타깝게도 그들 중에 나도 있었다. 폄하 논란을 보면서 우리사회가 쉽게 폄하하는 사회라는 것을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매스컴에 등장하는 모든 논객, 모든 평론가는 그야말로 폄하 전문가로 보인다. 진영을 대표하는 교수, 변호사, 언론인 그리고 평론가들은 상대를 헐뜯고 비난하려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카메라 앞에 서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그럴듯한 폄하와 폄훼로 먹고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이들만 폄하하고 있을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떨까? 어느 노 권사님의 절규를 잊을 수 없다. “목사님! 사랑, 사랑하지만 정말 사랑하나요? 잘되면 시기하고, 좀 안되면 멸시하고, ‘좋다!’ ‘잘한다!’라는 칭찬과 격려보다는 그럴듯한 말로 비판하고 비난하잖아요?” 그 권사님은 웃으며 말했지만 야구 방망이로 한 대 맞는 것 같았다. 그 권사님의 말씀에 한마디 반박조차 어려웠다. 

   

사실 우리는 쉽게 폄하한다. 남을 좋게 말하는 사람들을 만나기 그리 쉽지 않다. 일반사회는 잘 모르지만, 교회나 교계를 보면 더욱 그렇다. 교회나 교계가 폄하하는 사회라고 스스로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마치 ‘나는 나쁜 놈입니다’라고 말하는 것만큼 힘들고 발가벗은 몸으로 거리에 서는 것 같다. 

   

폄하 논란 기사를 보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우리 가족들이나 형제 간에도 폄하 발언이 풍성하다. 내 언어, 내 글, 그리고 내 삶을 살펴보니 폄하 발언이 수두룩하다. 다행히 고위직이 아니었고, 다행히 마이크가 없어서 허접스러운 나의 폄하 발언들은 주목받지 못한 채 바람결에 흩어졌고 문제로 비화하지 않았다. 하지만 폄하 논란을 통해 초라한 내 삶과 인격을 본다.

   

좋게 말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좋게 말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가능하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건강한 인격의 소유자다. 폄하하면 폄하당한다. 폄하는 폄하를 낳고 칭찬은 칭찬을 낳는다. 칭찬하고 격려하며 칭찬받고 격려받는 인생이 행복한 인생이다. 그래서 성경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히10:24)고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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