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영수의 코미디 40년 연예비사 코미디클럽 쇼의 흥망성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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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영수의 코미디 40년 연예비사<21> 코미디클럽 쇼의 흥망성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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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곤-엄영수,-전유성.(위)  김형곤과 기념촬영 찰칵!   /엄영수 제공


#. 김형곤 코미디클럽의 위장 테이블

1990년 9월 18일 저녁, 한국코미디 역사상 최초로 김형곤의 코미디클럽이 서울 강남 한복판 서초동사거리에 문을 열었다. 성인코미디의 정수를 보여준다. 야한 얘기꾼들이 총집합했다. 걸쭉한 19금 이야기다.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


출연진 MC 김형곤, 개그맨 심형래 이영자 엄영수 오재미 김진호 김한국 서인석 최승경 최영준 백현욱 한무 남보원, 모창가수 패튀김 조영필 김검모 이미저 너훈아.


코미디클럽 기획에 참여했던 손철 MC의 회고다. "음악감상실 쉘브르'(이종환 사장 겸 DJ)는 쇼의 흐름을 깨는 소란스러운 손님이 있을 때 웨이터가 조용히 다가가 '손님 지금까지 드신 것은 값을 받지 않겠습니다. 그냥 나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드시던 음식은 싸 드리겠습니다. 가시면서 맛있게 드십시오.' 속삭이듯 부드럽게 이야기하면 오히려 악착같이 계산 다하고 간다. 불량손님 쉽게 내쫓고 손님 한 테이블을 더 받아 매상을 올리게 되고 분위기가 좋아진다. 이 비법을 코미디클럽에 그대로 적용케 했다."


무대를 두세 사람 겨우 올라 갈 정도로 좁게 만들어 핀조명을 때리고 시선을 끌어 모았다. 객석과 무대를 최대한 가깝게 해 코미디하기 편하게 했다. 이 작은 것들이 모여 흥행대박을 만들었다.


손님 유치작전 광고문도 한 몫했다. “예약손님만 받습니다. 지금 즉시 예약하십시오.” 야간업소를 예약하고 가? 가면 무조건 어서오십시오지, 이놈들 봐라. 화는 나지만 참아야 돼. 재미있으니까. 손님들은 사람이 꽤 많이 몰려드는 걸로 착각했다. 늦게 가면 자리가 없을 것 같은 불안감이 들게 했다. 우선 예약한다. 책임감에 반드시 가게된다.


사실은 3개월 간은 손님이 없어 고전했다. 위장 테이블을 만들어 자리 채우고, 웃어주고, 박수쳐 주는 바람잡이를 깔았다. 미국의 유명한 쟈니카슨쇼도 다 그렇게 만든다. 마켓팅이 지극정성이었다. 어차피 인생은 쇼 아닌가! 코미디클럽 쇼인데 뭔들 못하랴! 세상일이 들키면 코미디다. 코미디는 무조건 무죄다.


#. 정치 코미디언 김형곤의 인생여정

김형곤은 다른 개그맨에 비해 몸집이 크다. 제일 먼저 눈에 띈다. 대중의 시선을 가장 많이 받게 된다는 뜻. 어떤 무대에 올려도 무대가 꽉찬 느낌을 준다. 즉, 빈틈이 없다. 안정감을 준다. 우선 몸으로 몇 수 앞서 나간다.


뚱뚱한 사람은 욕심이 많아 보이기 마련인데 전혀 그렇지 않다.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보인다. 거기에 짧은 듯한 발음이 천진난만한 어린이 모습 그대로이다. 어떤 배역에 어떤 말을 해도 지나치지 않고 재미있게만 느껴진다. 개그하기에는 최상의 조건을 갖췄다.


축구공도 잘 차고 몸도 빠르다. 두뇌회전도 전광석화 그야말로 만능이다. 그리고 독서광이다. 신문은 일간지, 월간지, 베스트셀러 닥치는 대로 다 읽는다. 잘 나가는 연극 영화 뮤지컬 다보고 있다. 특별한 이벤트나 인기있는 공연은 샅샅이 훑어 보러 다닌다. 작가적인 능력이 월등하여 그가 했던 코미디

극, 연극의 모든 대본은 본인이 직접 썼다. 정치풍자에 강하여 유머 1번지를 통해 '꽃피는 봄이오면', '탱자 가라사대', '회장님 회장님 우리회장님'을 방송했고 정치판 세태풍자로 장기간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생전에 김형곤에게 궁금한 게 있었는데 무엇이 바빴는지 말을 건네지 못했다. 못하는 게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는 항상 도전한다. 끈임없이 변화한다. 고스톱이나 카드를 하면 늘 내게 지고서 개평을 달라고 보챘다. 2년 쯤 지나서부터는 하기만 하면 다땄다. 개그맨끼리 벌린 판에서 싹쓸이 했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동료들과 문병을 갔다가 병실에서 고스톱을 쳤다. 아픈 몸으로 멀쩡한 개그맨들 돈을 다 털어갔다. 졌다! 아무래도 나이롱 환자에게 뒷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방송 코미디역사 백년! 한국 최초의 코미디클럽이 만들어 졌다. 발상과 사업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 젊은 나이에 주유소, 레스토랑 경영을 경험하더니 코미디를 하면서도 연예기획사를 설립했고 연극단체를 결성하여 대학로에서 장기공연을 펼쳐 롱런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극장을 만들어 경영했고

김형곤과 함께 떠나는 LA월드컵 현지 응원단을 만들어 나라사랑 축구사랑을 실천하였다.


심형래 양종철 엄영수 김형곤 네 사람이 부부동반하여 태국여행을 간적이 있다. 태국여행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태국 여왕이 게이를 불쌍히 여겨 재능을 개발하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했는데 우리는 그 곳에서 난생 처음 보는 쇼를 관람했다. 김형곤은 이 쇼를 보면서 한국에 있는 불우한 게이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던 것 같다.


귀국해서 드디어 일을 벌렸다. 게이 공연장을 만들어 잘 살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고자 열성적으로 노력했다. 어찌보면 국가적인 일을 김형곤이 혼자서 스스로 맡아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오랫동안 도와주었다.


정치개그가 발전하여 정치권에 도전장을 내고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다. 잘 싸웠고 성적도 좋았다. 서울 성동구에 출마하여 당시 무소속으로 여야 양당에 큰 충격을 주었고 무소속 중 전국 최다득표를 하였으나 안타깝게 꿈을 이루지 못했다.


기업인과 어울리더니 비룡그룹(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을 세웠고 정치인과 어울리더니 국회의원 출마 선언을 했던 김형곤, 시대를 앞서 가더니 영원히 앞서 가버릴 줄이야? 애통하기 그지없다!


원로 정치인 권노갑 고문의 회고. "정치, 경제 두 가지를 다 해서는 안된다.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돈이 생기면 집에 가기 전에 어려운 사람에게 미련없이 다 나누어줬다. 거물급은 지갑이 두 개다. 수표를 줄 사람 현금을 줄 사람 가려서 꺼낸다." 고등개그다. 정치 초단 김형곤은 비룡그룹에 머물렀어야 했다.


#. 엄영수 살린 조영남의 전화

조영남 형님께서 급히 연락이 왔다. 상봉동역 근처에 1층부터 5층까지가 전부 유흥업소인 건물이 있는데 5층을 코미디클럽으로 만들려고 한다. 사업성, 운영방법 등을 알아보기 위해 업주가 상담을 요청하니 내일저녁 상봉동 업소로 오라는 것이다.


상봉동은 서울 변두리에 멀리 있다. 야간업소 밤무대를 여러 곳 뛰고 있어서 손해가 크다. 그때 모든 유흥업소는 밤 12시에 영업을 끝내야 한다. 단속이 심할 때다. 마지막 일하는 업소가 영등포 중심가에 있는 '개그맨'이란 업소였는데 내 친구가 사장이었다. 밤 11시에서 11시30분까지 출연하는 시간이다. 상봉동 업주에게 전화로 간단히 상담을 해주고 말일이다.


그러나, 영남이 형님은 내가 일생의 멘토로 모시는 분이다. 모든 걸 제쳐 놓고 가야했다. 지하 1층 룸싸롱, 지상1층 스텐트바, 2층 나이트클럽, 3층 7080가라오케, 4층 캬바레, 5층이 비어 있었다.


상봉동 코미디클럽은 하면 안된다. 2주를 못버티고 망한다. ①수도권 인구1500만 명을 대상으로 김형곤의 코미디클럽 하나가 존재할 수 있다. ②코미디클럽에 출연할수 있는 코미디언이 당시 450명 코미디언 중에 10명이 안된다. 무대에 세워봤자 5~10분을 웃기며 버티지 못한다. 코미디프로를 녹화해서 방송하니까 직업이 코미디언인 것은 맞다. 코미디언이라고 다 웃기는 건 결코 아니다. ③상봉동과 코미디클럽은 어울리지 않는다. 코미디클럽은 양주를 팔지 않으면 코미디언 출연료를 감당할 수가 없다. ④김형곤 같은 MC를 구해야 한다. 어디서 구해오나? 수입이 되겠나?

안되는 이유는 밤새도록 쓸 수 있다. 야심차게 전 층을 각양각색으로 한국 최초의 주점천국으로 만들려던 업주는 실망이 컸겠지만 오늘밤 나 때문에 족히 몇 억을 앉아서 번 셈이다.


개그맨 설명을 듣고 코미디클럽 차렸다가 큰 손해를 본 경우가 많았다. 아니 전국에 차려졌던 모든 클럽이 순식간에 다 망했다. 웃기는 일이다. 정말 웃기는 일이다. 망해도 한 번은 웃기는 구나.


상담하던 그날 밤 바로 그 시간에 영등포 '개그맨' 업소에서는 무대를 마치고 사장과 매일 술마시던 그 방에서 내 친구는 갑자기 괴한의 습격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 일 하러 나갔으면 나는 친구와 함께 죽었을 것이다. 나만 살려고 공연 펑크를 낸 것 같아 친구에겐 너무 미안했다. 사람의 생사가 찰라에 있다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영남이 형님이 나를 불러내 화를 면케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깊은 인연이다. 평생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


내 생명의 은인이란 얘기는 영화나 소설 작품을 통해서 듣는 얘기지, 내 삶 속에서 이런 경우가 되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그래 인생은 코미디클럽 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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