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영수의 코미디 40년 연예비사 강병철과 일곱 삼태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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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영수의 코미디 40년 연예비사<20> 강병철과 일곱 삼태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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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철과 삼태기.  엄영수 제공

1. 봄을 기다리는 삼태기 탄생

70~80년대 한국의 문화, 경제는 초고속으로 발전하고 있었으나 정치, 사회는 급전직하 퇴보하고 있었다. 군부정치, 소요사태, 정보정치, 부정부패, 인권유린, 노동탄압, 학원사찰…. 대중가요는 역사의 거울이다. 이별과 눈물, 한탄과 설움, 절망과 죽음, 모든 작품이 비참한 시대를 담고 있었다. 다행히 7080가요가 시처럼 비처럼 내려와 평화와 자유를 갈망하는 민중의 목마름을 달래주기도 하였으나 세상은 여전히 春來以不似春(춘래이불사춘)이라 봄은 저 멀리 있었다. 


1981년 암울한 장막을 젖히고 강병철과 일곱 삼태기가 나타났다. 삼태기 속에 행복함과 풍년, 웃음과 춤을 잔뜩 퍼담고와 한도 끝도 없이 사람들을 향해 마구 뿌려댔다. 슬픔에 잠긴 사람들을 위해서 무대와 객석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놀이마당을 만들어 주었다. 저항가요도 혁명가도 아니다. 선량하고 정직하게 열심히 살면 좋은 날이 반드시 온다는 권선징악이 스며있는 희망가였다. 때를 기다리며 준비하라는 메시지로 봤다면 나만의 감상이었을까? 삼태기들은 나가자, 싸우자보다 효과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을 택했다.


강병철은 1971년 썰물과 밀물로 데뷔했다. 브르벨스의 장세용과 포크 듀오 머슴아들을 결성하여 3년 간 활동했다. 라틴 기타연주에 일인자였으나 라틴 음악이 설자리는 많지 않았다. 색깔이 강한 사람끼리 음악을 하다보면 부딪치기 쉽다. 부딪침 이것이 힘이다. 이 가수 저 가수 부딪치면서 조약돌이 된다. 훗날 일곱 삼태기가 태어나게 된 것이다.


2. 검소한 천재 형에게 빚지다

천재요절이라 하늘에는 지구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가 있다. 그곳에도 고급인력이 필요하다. 신은 일당백으로 일 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 그래서 천재를 일찍 스카우트한다. 각종 메들리시리즈를 개발(삼태기, 항구, 동요, 냉면, 서울 등)한 것은 보통사람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썰물밀물, 머슴아들, 강별철과 삼태기. 한복, 평복, 비바통, 장구, 징, 피리, 꽹가리, 호적 등 일관되게 국산 이름이나 국산품을 갖고 우리음악, 우리놀이를 추구했던 것에서 그의 독특한 개성과 천재성을 엿볼 수 있다. 군림하는 가수가 아니라 대감이 무대 위에서 아랫 것들을 섬기며 절을 하고 객석 구석구석을 훑어서 일일이 찾아다니며 겸손하게 음악을 배달하는 그리고, 관객의 손을 잡고, 몸을 부등켜 안고, 평민대중을 정중히 모시는 모양새가 맘에 든다. 어지럽게 한바탕 놀고 나면 속이 시원해진다. 


한때 대한민국에 봉고차 바람이 불었다. 강병철과 삼태기는 기사까지 10명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봉고차를 타고 다녔다. 쓰임새가 좋아 전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차였는데 공교롭게도 떼강도들이 범행에 이 봉고차를 많이 사용했다. 강병철은 성공하여 돈도 많이 벌었지만 평생 봉고차 이상의 고급차를 타지 않고 검소하게 살았다.


리포터로 뛸 때 라디오방송국 녹음실에서 밤늦게까지 편집을 하고 있었다. 밤무대 무용수의 애환을 녹음한 테이프였다. 방송을 하고 가던 강병철 형이 들렀다.

“영수야 네가 이걸 왜하냐? 이건 쟤들이(PD) 할 일이야. 넌 지금 혹사당하고 있어. 너를 잘한다, 최고다 하니까 착각하는데 TV에 나가서 너를 알리고 자리를 잡아야 해. 라디오국에 처박혀 있다가 나중엔 쫓겨나. TV에서 크면 돈 더 주고 프로도 맡기고 모셔다 쓴다니까. 내일부터 여기 손떼.” 만약 내가 이걸 담당 PD에게 전하면 형은 출연정지에 방송국 출입금지까지 될 것이다. 누구도 못하는 위험한 말을 단호하게 했다. 후배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었다. 


나와의 인연은 남다르게 각별했다. 크게 돼서 보답하겠다고 몇 번씩 다짐했었다. 지금 형이 있다해도 빚을 갚을 길은 없다. 아직도 못컸다. 끝내 못 클 것 같다. 빚 안 갚을려고….


3. 강병철과 삼태기의 저주

막내 삼태기 이병곤의 회고다. 1988년 11월 22일 0시44분44초(초단위까지 측청했다면 이렇게 됐을 것이다. 숫자가 계속 쌍으로 나오지 않나?) 경인고속도로 신월IC 부근에서 순경이 음주운전으로 몰고 가던 프라이드(가장 작은 차)가 강병철과 삼태기 대형 봉고차를 추돌했고, 봉고차는 가로수에 부딪힌 뒤 뒤집어졌다. 마치 닭이 용을 기습하여 용이 쓰러지는 형상이다. 그래서 옛말에 용띠와 닭띠는 잘 맺어지기 어렵다고 한다. 나는 다리가 부러지고 장파열에 팔과 허리를 다쳤지만 차 밖으로 탈출하여 우선 담뱃불을 붙였다. 멀리서 사고를 낸 차 운전수가 달려오다가 깜깜한 밤중에 흰색 한복에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나를 보더니 귀신을 연상했는지 깜짝 놀라 돌아서 도망치려고 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아픈 것도 잊고 붙잡아서 목을 졸랐다. 경찰이라고 했다. 주먹을 휘두르고 증명서를 뺏은 후 구급차에 실렸다. 


그 후로는 기억이 없다. 강병철 형은 현장에서 44살에 돌아가셨다. 옆에 있던 동료 홍성수, 이완희는 6개월간 나는 1년간 치료를 받았다. 보험사에서 가수 정년을 계산하는데 법적으로 일반가수는 40세, 민요가수는 60세, 우리는 민속민요를 불렀고 국산 한악기를 썼기 때문에 민요가수로 입증돼 보험료를 더 받을 수 있었다. 계속 삼태기 가수의 맥을 이어가려고 했으나 유족들과 강병철 이름을 쓰는 협상이 안되서 포기했다. 그후 나는 이방과 사또를 만들었고, 불교TV KBS 6시 내고향에서 활약했다. 서울 삼태기, 인천 삼태기, 석삼태기, 넷삼태기 등 벼라별 삼태기를 다 만들어 재기를 도모했으나 하나같이 모두 실패했다. 왜 잘 안 풀릴까? 뭐든지 하면 망할까? 우리 스스로 “강병철과 삼태기”의 저주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4. 104곡 메들리 세계 최초

원조 삼태기 김한만의 회고다. 강병철과 삼태기 음악은 일단 재미있다. 대중적이다. 이것이 기폭제가 돼서 서태지가 나타났다. HOT를 거쳐 걸그룹 아이돌 시대까지 확장되어 나갔다. 어찌보면 한국랩의 원조라 하겠다. 한 노래에서 한 소절씩 따다가 노래를 만드는 것도 어렵지만 104곡으로 만든 노래를 악보 없이 외워서 부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이것을 해냈다. 세계 최초다. 지옥훈련이었다. 강병철 선배의 사고가 없었다면 또 다른 길로 진화했을 것이다.


당시 녹음실에서 음반을 만들 때는 아날로그 시대였다. 녹음하다 한 번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한다. 표시 안나게 자르고 붙이는 게 안된다. 노래가 워낙 길어서 몇 번 NG가 나면 큰 낭패다. 녹음실에서는 긴장이 고조되고 관계자들이 지켜보고 있어서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기가 어렵다. 생각보다 빨리 목이 가라 앉는다. 그런 날은 녹음을 더 이상 할 수가 없다. 일곱 삼태기 일정에 녹음실 일정, 강병철 선배의 개인일정, 여기에 밤업소 일은 계속 해야하기 때문에 녹음은 한 없이 늦어져 음반 한 장 만드는데 연습시간 빼고 녹음기간만 해를 넘겼다. 79년에 팀을 결성했고 81년에 겨우 음반을 냈다.


처음 104곡짜리 메들리곡을 만들었는데 한 노래에서 가사를 한마디씩 따서 연결하게 돼 있었지만 하다보니 두 마디 세 마디씩 따온 게 있어서 중복된 곡수를 빼니 97곡 21분54초 세계 최초의 기록적인 노래가 탄생했다.


다방DJ, 나이트크럽DJ, 음악감상실DJ, DJ문화가 한창일 때(이때가 DJ총재 전성기였다) DJ들을 누가 찾아오거나 급한 볼 일이 있거나 야식간식을 먹거나 화장실을 갔다와야 할 경우 삼태기 메들리 판을 틀어놓고 갔다오면 아무 이상 없이 해결된다. DJ들은 이곡을 많이 이용했다. 팬들은 노래방에서 메들리 누가 가장 가사를 많이 외워서 오래 부르나, 어디까지 부를 수 있나 등의 내기를 했다.


5. 휴머니스트가 되자

가수끼리 그룹을 결성하면 그룹이름을 짓고 노래를 작곡한 사람이 그룹소유권을 갖는다.  대표, 사장, 재산권, 모든 걸 독식한다. 나머지 단원은 노동자이고 을일 뿐이다. 어떤 듀엣은 1년에 네 번도 교체했다. 소유주의 심기를 건드리면 즉시 해고다. 이것이 연예계다. 같이 일하지만 종업원일 뿐이다. 


삼태기는 다르다. 단 한 명이라도 신인으로 교체되면 골치가 아파진다. 삼태기 메들리 곡 전체 가사암기와 호흡 맞추는데만 2년 이상 걸린다. 2~3명이 파업할 경우 의견만 틀려도 그룹이 해체될 지경이다. 그러니 웬만하면 달래서 그대로 써야한다. 노동조합을 만들 수도 없지 않은가, 강병철과 일곱 삼태기가 석삼태기까지 내려갔다. 


강병철 혼자 삼태기를 들고 나와 “안녕하세요, 강병철과 삼태기 입니다" 하는 사태까지 올 수도 있다. 

열명의 단원은 매일 아침 10시~ 새벽 4시까지 밤무대 10곳 이상, 이벤트, 라디오와 TV 방송, 지방업소 일을 했다. 하루 16~18시간 강행군은 위험한 노동이다. 인기가 종종 사람을 잡는다. 위대한 음악인 강병철의 아픔이 적지 않았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배려와 양보와 소통이 필요하다. 문화와 예술은 휴머니즘이 없다면 생명을 잃는다. 휴머니스트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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