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 미국 역사는 ‘열차’를 타고 꽃을 피웠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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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등] 미국 역사는 ‘열차’를 타고 꽃을 피웠다(1)

웹마스터

이보영

전 한진해운 미주본부장


지금 우리는 인공지능(AI와 챗GPT) 시대를 살면서, 그 옛날 고리타분한 ‘열차’ 얘기를 꺼낸다는 것이 시대를 역행하는 것 같지만, 미국의 역사, 산업화의 과정을 살펴보면 ‘열차’가 끼친 영향을 간과할 수가 없다.


‘열차(列車)’는 철도 위를 달리는 한 대 이상의 차량들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가장 긴 운송수단이다. ‘철도(鐵道)’는 길을 평탄하게 만든 후, 그 위에 레일(Rail)을 깔아서 구성된 궤도를 달리는 시스템이다. ‘레일’은 기원전 이집트가 피라미드 건설에 필요한 석재 운반을 위해 땅에 깔았던 것이 그 기원이라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육지에서 만든 배를 해변으로 이동시킬 때 레일을 이용했다고 한다.


열차(Train)가 도입되면서 세상은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역사적 대변환이었다. 따라서 “근대사(近代史)는 열차를 타고 꽃을 피웠다”고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표준시(Standard Time)는 열차의 출발과 도착 시각을 지역 간의 공통시간제를 위해 철도시간(Rail Time)에 의해 만들어 졌다. 이후 “태양은 더 이상 출근시간을 결정하지 못한다” 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생겨났다.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평생을 살아오며 고향 밖을 몰랐던 상민(常民)들에게 기차는 새 삶의 기회를 찾아주기 시작했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우물 밖의 광활한 세상을 보고 놀라 듯이 보통사람들은 눈을 뜨기 시작했다.


곡식, 채소, 과일들은 열차를 통해 신선하게 도시로 전달되고, 신문, 잡지, 책, 의복, 상품들은 열차를 통해 시골로 빠르고 폭넓게 전파되었다.


철도가 깔리면서 일정 거리마다 열차가 정차하는 철도역(Station)이 생기고, 철도역 주변엔 마을이 형성되고, 마을엔 인구가 모여들고, 역세권의 산업도시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철도는 사람과 물자를 모으고, 실어 날랐고, 철도에 종사하는 일자리까지 제공했다.


석탄을 연료로 하는 증기기관을 철도에 이용한 나라는 1825년 영국이 최초였으며, 스탁턴(Stockton)과 달링턴(Darlington) 사이의 40km 거리를 시속 20km로 달리기 시작했다.


‘기차(汽車)’라는 단어는 ‘증기동력(Steam Engine)을 사용하는 차(車)’라는 뜻에서 열차를 기차로도 부른다.

영국의 철도소식이 미국에 전해지자, 미국의 마차(馬車)계에는 뒤숭숭한 괴담(怪談)이 돌기 시작했다. 철도가 놓이고 열차가 달리면 주변의 젖소들이 겁에 질려서 우유가 감소하고, 양의 털도 변색될 것이라며,

축산 농부들을 선동했다.


'열차는 속도가 빨라 열차에 탄 승객들이 호흡 곤란을 일으켜 질식할 수도 있다'라는 낭설도 난무했다.

괴담과 선동은 예나 지금이나 정책의 반대자들에 의해 늘 존재했던것 같다.


미국의 역사는 ‘우마차 운송시대’에서 철도 운송시대로, 열차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광대한 땅의 통합성과 다양한 인종의 정체성을 묶는 첫 기폭제가 바로 철도였기 때문이다.


항공기가 없고, 고속도로가 없었던 시대, 철도는 험난한 산맥을 뚫고 동서부를 잇는 첫 교통로였다. 철도는 동서간의 교류는 물론,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고, 국력을 성장시키는데에 큰 공헌을 했다.


미국의 첫 철도는 1830년에 볼티모어 & 오하이오 구간에 개통되었다. 볼티모어에는 이를 기념하는 철도박물관(B&O Railroad Museum)이 있다.


1861년 남북전쟁 직전까지 미북부는 폭발적으로 철도를 도입했다.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승리한 것은 철도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남군이 군사력은 더 우세했지만, 북군은 철도로 병력과 물자를 빠르게 대량으로 이동시킨 결과였다.


남북전쟁이 종료되자 연방정부는 ‘동서 대륙횡단 철도’ 라는 대규모 프로잭트로 ‘서부개척시대’를 열었다.

당시 미국은 광활한 농경지 캘리포니아를 손에 넣었지만 동(東)과 서(西)를 연결하는 마땅한 교통망이 없었다. 마차를 타고 황무지를 몇 일씩 달리다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인디언의 습격을 걱정해야 했다.

실제로 대륙횡단철도가 건설되면서 대륙의 원주민인 인디언들은 생활터전을 잃고 흩어지게 되었다.


대륙횡단철도는 미국의 대표적 두 철도회사가 동서 양방향에서 시작하기로 결정되었다. 동부의 ‘유니온퍼시픽철도(UPRR)’는 네브라스카 오마하에서 서쪽방향으로, 서부의 ‘센트럴퍼시픽철도(CPRR)’는 캘리포니아의 새크라멘토에서 동쪽을 향해 철도 부설을 시작했다.


UPRR은 주로 아일랜드계 노동자를 사용했고, CPRR은 중국인 이민자들을 노동자로 사용했다. 동과 서에서 시작한 철도건설은 막대한 물자와 노동력으로 1869년 5월, 유타주의 솔트레이크에서 만났다. UP와 CP는 마지막 레일을 연결하고, 장장 6년 간의 대장정을 마쳤다.


UP는 오마하에서 서쪽으로 1,747km, CP는 새크라멘토에서 동쪽으로 1,110km를 연결했다. CP의 철도거리가 UP보다 짧은 것은 네바다로 넘어가는 산맥 구간에 워낙 험준한 터널과 다리 공사가 많았고, 중국인 노동자의 희생이 많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사가 완료된 후, CPRR의 스탠포드(Reland Stanford) 사장은 중국인들의 희생을 애도하며, 샌프란시스코에

그들의 거주지로 차이나타운(Chinatown)을 기부했고, 그가 설립한 스탠포드대학교에도 일정 비율의 중국인

학생 입학을 허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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