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광의 행복칼럼] 안디옥교회 크리소스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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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광의 행복칼럼] 안디옥교회 크리소스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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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크리소스톰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탁월한 설교가로 유명하다. 아울러 그는 탁월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교회 지도자로 알려진다. 아들 교육에 진심이었던 그의 어머니 안두사는 아들이 당대에 가장 탁월한 인문학(수사학) 선생에게 교육을 받게 했다. 귀족의 딸이었던 그녀는 20세에 남편을 잃고 아들 교육에만 집중했다. 크리소스톰 어머니는 아들을 유능한 변호사로 만들려고 했고 변호사를 만들었으나 결국 그는 교회사에 빛나는 목회자가 되었다. 

   

크리소스톰은 당시 최고의 스승들에게서 철학과 수사학(인문학)을 공부했다. 그는 탁월한 학문적 자질로 여러 스승의 사랑을 받았단다. 특히 그 당시 세계적 명성을 누렸던 정치가요 법률가였던 수사학(인문학)자 리바니우스의 큰 사랑과 인정을 받았다. 리바니우스는 크리소스톰을 교회에 뺏기지 않았다면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싶다고 밝혔다. 그만큼 크리소스톰은 탁월한 인문학자였다. 

   

크리소스톰은 18세쯤 안디옥 감독 멜레티우스 집례로 세례를 받았다. 크리소스톰은 성공적인 변호사였다. 크리소스톰은 금욕적 수도사 생활을 원했으나 어머니의 간절한 만류로 변호사 생활을 계속했다.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크리소스톰은 수도원학교에서 3년간 신학을 공부했다. 

   

그때 다소 출신 디오도레라는 신학자에게서 3년간 신학을 배우며 크리소스톰은 안디옥 학파의 문자적 성경해석법을 배웠다. 안디옥 학파는 우화적인 해석으로 유명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반하여 문법적 역사적 의미를 찾는 성경해석법이다. 이 성경 해석법이 그가 위대한 설교자가 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모친 안두사가 사망한 후에 크리소스톰은 안디옥 남부 사막지방으로 가서 6년간 수도생활을 했다. 그는 수도생활을 통해 성숙한 신앙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고행과 수련의 과정에서 건강이 극도로 악화하였다.

   

크리소스톰이 안디옥으로 돌아오자 안디옥의 멜레티우스 감독은 그를 집사로 안수했다. 그리고 5년 후 플라비안 감독이 그에게 사제 서품을 주었다. 그 후 크리소스톰은 12년 동안 안디옥 강단교회에서 목회했다. 크리소스톰은 감동적인 설교를 했다. 그는 성경의 진리를 강론했고 자신의 삶에 실천했다.

   

그는 안디옥교회를 목양하며 탁월한 영적 지도력을 발휘했다. 주 후 387년에 새로운 조세제도에 불만을 품은 안디옥 백성들이 유혈 폭동을 일으켰다. 흥분한 군중은 황제와 황제가족 조각상을 모독했다. 로마황실은 이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대대적 처형이 예상되었다. 시민들은 공포와 불안에 떨었다. 

   

크리소스톰은 절망과 두려움에 싸여 떨고 있는 시민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안정시켰다. 이때 크리소스톰은 열정적인 설교를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기도했다. 그의 강력한 사역은 안디옥은 물론 로마를 감동시켰고 사건은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안디옥 교회도 로마 황실도 그를 진정한 하나님 사람으로 인정했다.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요한 크리소스톰은 그의 탁월한 식견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당당했고 따뜻했으며 냉철했지만 자애로운 목회자였다. 안디옥교회에서 유아기를 보냈고 성장했던 그는 훌륭한 담임 목회자가 되었다. 크리소스톰은 건강한 신학과 인문학으로 준비된 탁월한 목회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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