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영수의 코미디 40년 연예비사


홈 > 로컬뉴스 > 로컬뉴스 > 문화라이프
로컬뉴스

엄영수의 코미디 40년 연예비사<13>

웹마스터

가수 김세레나-엄영수(위). 김대중 전 대통령과 악수하는 엄영수.   /엄영수 제공

스테이지 매너


#. 무대는 진실을 말한다

국회의원회관 대극장 식전행사 마지막 가수 김세레나를 소개하려는 찰라 'DJ'께서 입장했다. 당()행사는 총재가 대통령이다. 일단 '동작그만'이 걸린다. 김세레나는 2부로 넘어가면 2시간 가량 기다려야 한다. 지금 즉시 무대에 올려 달라고 급박한 사정을 호소한다. 


오랜기간 당에서 하는 많은 공연을 했기에 익히 가까운 한광옥 실장께 간절히 읍소했다. 보고를 받은 무대 중앙의 DJ는 웃으며 흔쾌히 승낙했다. 축가 1곡을 허락받았다. 관객은 환호성과 박수로 천지를 진동시켰다.


전날 DJ 일정이 급하니 시간을 엄수하라는 지침이 있었다. 모두가 바쁘다. 가장 바뿐 것은 민중이다. 눈도장 찍었고 방명록 사인했다. 예고된 쇼 빨리 보고 생업에 복귀해야 한다. 삶이 절박하다. 뺏긴 시간 보충해야 한다. 노련한 DJ는 민중의 안타까운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었을 것이다.


김세레나의 스테이지 매너는 최고 수준이다. 당대 관객들을 쥐락펴락하는 천하일색 명가수로서 춤과 노래와 화술에 있어 경쟁자가 없다 할 것이다. 

“총재님 일정이 매우 바쁘시다고 들었습니다. 앵콜 요청 너무나 감사합니다만,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총재님 어떻게 할까요.” DJ는 온화한 표정으로 4곡까지도 앵콜을 받도록 했다. 


속은 타고 급했겠지만 중요한 건 대세와 흐름이다. 끊지 않고 우선 받아들이고 뒷일은 별도의 대책을 세워 수습한다는 전략이다. 시계를 본다거나 어두운 표정으로 늦었다는 느낌을 주는 행동은 일절 없었다. 태연하고 인자한 모습 그대로다. 선당후사가 아니라 선민후당 즉, 선 관객 후 대중 이라고나 할까. 이날 무대 위의 모든 움직임을 관객은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한광옥 실장, 김세레나 가수, DJ의 스테이지 매너는 명품이었다. 쇼가 아니라 사실이다. 모두가 윈윈한 것이다. 사람의 일이다. 아름다웠다.


일이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이날이 김세레나를 쇼무대에서는 처음 만난 날이다. 매니저가 귀띔했다. 엄영수 '싹아지' 없다. 소개할 때  너무 짧게 했다.  최소한 국보 김세레나란 얘기는 했어야지. 민요의 여왕! 최고의 무대 매너! 왜 한마디 안 하나, 선배를 박대했다고 벼른다는 것이다.


김세레나의 강남 업소를 찾아갔다. 급박했던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기도 전에 언제 오해했냐는 듯, 그날 수고 많았다. 너무 고생시켜서 미안했다. 진작 불러서 위로했어야 했다며 전해들은 얘기와는 전혀다른 모습으로 금일봉과 선물을 전해주며 반갑게 맞아 주었다. 바로 이것이다. 틀릴 줄 알면, 고치고 고쳤으면 표현할 줄 아는 것, 이것이 최고의 매너다. 그후 30년 연예계에 가장 가까운 누나 동생으로 최측근으로 지내고 있다. 사회자는 전체를 봐야 한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참고 기다리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 화를 내면 화를 당한다

창원 근로자의 날 기념식장 연예인 대기실. 가장 늦게 온 가수 S가 가장 먼저 가게 해달라고 떼를 쓴다. 방송 스케줄이 있다, 이벤트쇼가 있다고 떠벌리면서 과격하게 요구한다. 주최 측이 약속대로 온 순서에 의해 진행하겠다고 설명하자 바쁜 사람, 중요한 일 있는 사람부터 편의를 봐줄 수 있지 않느냐며 격하게 항의한다. 누구한테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늘어 놓는다. 공연장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연예계 인정은 아직도 살아 있다. 다급한 사람, 위기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우선적으로 도와주려는 정신이 차고 넘치는 곳이다. 들어주지 못할 때는 거짓말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S부터 공연을 시켜서 먼저 보내고 우리끼리 기분좋게 공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주최 측이 나섰다. 모두 동의했다. 잘 해결됐다. 이게 문제다. 


악을 쓰면 득을 본다. 언어 폭력이 먹어준다고 믿게 된다. 그래서 목적 달성을 위해 화를 내는 강도가 더 세지고 리얼하게 느껴지도록 연기가 고조된다. 너무 지나치면 폭발할 텐데, 못견디는 척 하던 것이 진짜 못견디게 되어 쓰러지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S에게 언젠가는 한 번 큰 일이 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서울 대기업 회장의 미수연 파티가 있었다. 공연 대기실에 있던 S가수가 밤 8시에 공연하기로 약속 돼 있었는데, 8시13분이 되자 약속을 어겼다며 손해배상을 해야된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행사 관계자가 극구 만류하며 붙잡는데도 S가수는 뿌리치고 다음 공연장으로 가겠다며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극도로 흥분되고 화난 얼굴에 몸에서 열기가 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순전히 억지였다. 이런 가수는 처음 본다. 20분 후에 주차장으로 내려갔던 S가수가 다시 대기실로 돌아왔다. 바로 무대에 올렸다. 스테이지 매너를 아무리 위장해도 망가진 얼굴이 바로 복원이 안된다. 한참의 시간이 필요하다. 관객은 빠르게 알아차린다. 나중에 들은 얘기다. 주차장에서 100만원을 더 주고 다시 데리고 올라왔다고 한다. 100만원을 더 벌기 위해 쇼를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댓가는 참혹했다. 얼마 되지 않아 S는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예감은 적중했다.

d6c079dc5bf6a5868f9d9be57c3bcd3c_1686675813_989.jpg
 


#. 무대 매너 인간 매너

대구 그랜드호텔 빅스리스타 초청 디너쇼 출연자 대기실. 여가수 최와 김의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관객이 많았고 열광적으로 호응하는 여성팬이 많았다. 세 명의 가수가 함께 하는 디너쇼는 퍽 드문데 서로 상대방을 의식해 경쟁을 치열하게 하니 그것이 볼거리였다. 


한국의 디너쇼처럼 싱거운 것도 없다. 값은 엄청 비싼데 가수는 늘 부르던 노래 그대로 하고 관객들은 듣고 고기 한 조각 먹는 게 고작이다. 뭔가 변화를 주고 객석을 흔들어 대는 공격적인 무대가 되어야 하는데 아쉬운 점이 많다. 벽에 빤짝이는 금박지 은박지 붙이고 플래카드 걸어 놓는 것 말고는 다른 걸 본적이 없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이 디너쇼를 보는가?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나는 봤는데, 너는 못봤지' 격차를 즐기며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서 본다.


세 번째 주자 L가수는 도착하자마자 사과부터 했다. 죄송해요. 의상이 이래서 이런 쇼인 줄 몰랐어요. 미안해서 어떻게 해요?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몸둘 바를 몰라했다. 어떻게 쇼를 해야할지 태산같은 걱정을 했다. 격려와 위로를 건넸다. 괜찮습니다. 노래가 중요하지요. 노래를 잘하시니까 문제될 거 없습니다. 인근에서 다큐멘터리 촬영이 있어서 녹화를 하다가 급하게 오느라고 의상준비가 좀 미흡한 게 있으니 양해해 달라고 부탁하겠습니다. 어머 감사해요! 그래 주시겠어요? 우리가 웃기면서 얘기하면 웬만한 건 'OK' 그냥 넘어갑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의상은 수준 이하였다. 무슨 사연인지는 묻지 않았다. 무엇이 어떻게 전달됐는지 몰라도 싸구려 검정 광목으로 만든 망토 스타일인데 차라리 인근 상가에서 급한대로 한 벌 사 갖고 왔어도 훨씬 나을 뻔 했다. 그런대로 잘 포장해서 앞 가수와 별 차이가 안나게 끔 끝냈다. 


L가수와는 이런 시절도 있었다. 세월이 꽤 흘렀다. 송파구 구민축제장에서 MC와 초대가수로 다시 만났다. 마지막 피날레 가수를 소개했고, 멋지게 노래를 한 후에 큰 박수를 받았다. 확실히 인기가 있었다. 반가웠다. "네, 노래 잘들었습니다. 가창력 하면 최고의 가수죠 하면서 인터뷰를 하려고 다가갔는데, 나를 피하면서 밴드마스터 악단장 앞으로 가더니, 어머 선생님 여기서 악단장을 하시네요. 반가워요. 선생님 봰지가 오래 됐는데 하면서, 작곡가 선생님입니다. 객석에 소개까지 했다. 사적인 얘기를 몇 마디 나누더니 이번에 들려 드릴 노래는 하면서 얼른 다음 노래로 넘어갔다. 나를 패싱하고 지나갔다. 괘씸한 일이다. 이제 일류가수가 됐으니 엄영수 너 하고는 놀 필요없다. 꺼져라! 이 말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다행히 100세 시대다. 앞으로 나를 세 번은 마주치겠는데 역전되는 날도 있을 것이다. 너와 나의 매너를 누군가는 보고 있다.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