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률 칼럼]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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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률 칼럼]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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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나서 최초로 배운 노래는 ‘꽃밭에서’였다. 하루 고작 세 번, 신작로에 먼지를 풀풀 날리며 시골버스가 다니던 시절, 마초 아버지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어머니는 밤이 이슥해지면 취학 전 어린 삼형제에게 하모니카를 불어 가며 이 노래를 가르쳤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아빠가 매어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애들하고 재밌게 뛰어 놀다가/ 아빠 생각날 때는 꽃을 봅니다/ 아빠는 꽃보며 살자 그랬죠/ 날 보고 꽃같이 살자 그랬죠.’ 노래가 끝날 때쯤이면 아랫목에 고이 모셔진 아버지 밥그릇의 온기를 발가락으로 느끼며 어린 생명들은 잠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하나의 거룩한 종교였던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이 노래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지금도 초등 음악교과서에 실려 있다. 그러나 이 노래가 전쟁에 나가 돌아올 기약조차 없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지독히 슬픈 노래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나도 어른이 되어서 비로소 알았다. 6.25 전쟁 중이던 1953년 발표됐고 전쟁통에 헤어진 아버지를 그리는 노래다. 예쁘게 핀 꽃과 꽃밭을 만든 자상한 아빠와 딸아이를 상상하던 사람들은 놀라게 된다. 가만히 불러보면 슬프고 애잔한 노래임을 서서히 눈치채게 된다. 전쟁으로 인해 돌아오지 못한 아빠를 그리고 있는 것을 상상하면 목이 메어 끝까지 부르기 어렵다. 6.25 전쟁이 시작된 6월과 삼년의 전쟁 끝에 휴전이 된 7월, 모두 여름이다.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이고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는 계절이다. 동요, 그러나 전쟁의 슬픔을 형상화한 노래다. 


그러나 언젠부터인가 우리는 전쟁을 도발한 북한정권에 대해 애써 모른체 하며 살고 있다. 오히려 전쟁중에 발생한 국군과 미군의 잘못만 부각하는 황당한 시대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아빠가 돌아오지 못한 것은 북한이 일으킨 남침이 원인이었다는 것을.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되어도 변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6.25는 미국에서도 오랫동안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으로 불리며 외면당해 왔다. 2차대전과 베트남전쟁 사이에 낀, 잊고 싶은 전쟁에 불과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1950년 겨울, 미해병 1사단은 함경남도 개마고원, 장진호 일대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어 전멸하다시피 했다. 그해 겨울 벌어진 전투는 미군 전사에도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작전을 통해 해병 1사단은 중공군 남하를 일시 지연시켰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도 봤다.” 작고한 현인 선생의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의 창작동기가 된다. 미군은 ‘굳센 금순“으로 대변되는 수많은 피난민을 남쪽으로 탈출시키는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영화 <국제시장>의 배경이다. 얼마 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랠프 퍼킷 주니어 예비역 대령에게 수여한 명예훈장도 장진호 전투에서의 무공을 기린 것이다. 바이든은 방미 중인 문 대통령을 초대해 훈장수여식을 가졌다. 외교가에서는 중공군과 맞선 자국의 6.25 참전장교의 훈장수여식에 문 대통령을 예외적으로 초대한 것은 문정권의 지나친 친중 행보에 대한 일종의 경고라는 분석이 나왔다. 


나는 워싱턴에 갈 기회가 있으면 한국전쟁 공원을 찾는다. 판초우의를 덮어선 지아이(GI)들의 일그러진 얼굴동상에서 정녕 자유가 공짜가 아님(freedom is not free)을 실감한다. 무려 5만4245명의 미국청년들이 “조국의 부름을 받아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한번도 들어 본 적도 없는 태평양 건너 멀고 먼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오자마자 며칠 뒤 전사했다”고 적혀 있다. 읽는 나의 마음은 순간 울컥해졌다. 맞다. 전쟁은 언제나 악한 자보다는, 선한 사람부터 영문도 모른체 먼저 죽게 된다. 소포클레스의 말이다. 불현듯 6.25 노래가 생각난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6.25가 가까워오면 음악수업보다는 교련시간에 이 노래를 배우고 불렀다. 청록파 시인 박두진 선생이 지은 노래말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잊고 살고 있다. 엊그제가 6.25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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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률 칼럼니스트: 서강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려대를 졸업했다. 사우스캐롤라이 매체경영학 박사를 했다. KDI 연구위원, 영화진흥위원, EBS 이사, 공기업 경영평가위원 등을 역임했다. 한국의 주요 일간지에 기명칼럼을 연재했으며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유려한 문장과 설득력 있는 글로 사랑을 받아 왔다. 그의 에세이는 한국의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게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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