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경주벚꽃, 여수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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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경주벚꽃, 여수동백

웹마스터

김희식

(주)건축사무소 광장 상무 


봄꽃 구경을 나섰습니다. 이번에 다녀 볼 두 곳은 동서로 방향이 서로 떨어져 있는 곳이라 국토종단(縱斷)이라고 해도 그다지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다름 아닌 경주와 여수 두 곳입니다. 두세 시간이면 전국을 누비는 고속열차 덕분에 영남과 호남 두 곳을 다녀오는 것이 가벼운 출장길에 나선 듯 했습니다.


첫날 아침, KTX를 타고 신경주역에 도착했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찾아간 경주 땅입니다. 어떤 장소에 도착했을 때 뜻하지 않거나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서 만나는 즐거움을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고 하던가요. 신경주역에 당도했을 때 느낌이 바로 그랬습니다. 역 앞에 사방으로 둘러쌓인 푸릇푸릇한 산, 겨우내 묵혀두었다가 갈아 엎은 논과 밭 고랑사이로부터 나는 흙 냄새들이 상쾌하게 다가왔습니다.


챗 GPT까지 등장한 초(超) 디지털 세상이지만 소환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인들이 초면으로 만나 통성명을 할 경우가 있죠. 그럴 때 이런 말들이 오갑니다. “어디 김씨, 어디 이씨인가요?”하는 식의 본관을 묻는 일입니다. "예, 저는 경주 김가 입니다”라고 대답하면, 상대방은 저는, 전주 이씨 입니다”라는 식의 말들이 오가는 경우지요. 아마 챗 GPT도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일 겁니다. 그래서일까, 경주 김가(家)인 필자는 경주를 찿을 때마다 마치 본향에라도 온 듯한 편안함이 있습니다.


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도로변에는 흐드러지게 핀 벚꽃들이 찿는 이들을 반기고 있었습니다. 제30회 경주 벚꽃마라톤을 알리는 현수막도 걸려 있더군요. 오래전 이곳 마라톤대회 중 한 종목인 10Km 구간을 뛸 때, 눈처럼 날리는 벚꽃사이를 달리던 기억도 납니다. 첫 방문지는 수백 년 된 소나무들이 울창한 ‘남산’입니다. 


경주 남산은 ‘노천박물관’이라는 얘기도 있고 해서 평소 관심을 갖고 있던 곳이기도 했지요. 경주를 유독 좋아해서 수십 차례 경주를 답사했다는 어느 고고학자의 글을 이어봅니다.

 "이 곳 남산에는 신라 때 유적과 유물이 산재해 있는 곳입니다. 100개가 넘는 절터와 100개가 넘는 석불과 석탑이 존재하는 산입니다. 신라인들은 자신의 능력이 되는 한 적어도 한반도 내에서는 최고 수준의 무언가를 만들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한반도에서 마지막 승자 이미지가 강한 나라였던 신라의 흔적들이 경주 곳곳에 남아있습니다”.(일상이 고고학, 황 윤, 2020).


산행 중 흩어져 있는 남산의 유물들을 돌아봤습니다. 산 정상에는 ‘국립공원 남산, 높이 468미터’로 새겨진 키높이의 화강석 비(碑)가 서 있습니다. 하산 후 불국사, 국립박물관 등도 들렀습니다.두 곳에서는 문무(文武)를 겸한 신라의 문화유산들이 가득했습니다. 주변 벚꽃 숲은 ‘겹벚꽃’ 품종인지라 주먹만한 함박눈처럼 나뭇가지에 피어 있었고요.


다음 날, 동백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는 여수 오동도로 향했습니다. 동백꽃을 보며 생각나는 시인의 시가

있습니다. 

 "시가 써지지 않는 날은/여수로 오라/여수에 와서 여수어라*/빈 네마다 새우며 들이치는/엄니의 바다를 서 있어 보아라/사랑을 얻었거나/잃은 날에도/여수로 오라/시누대 오솔길 속을/한참이나 헤매어 보다가/그중에서도/가장 붉었던 때를 향하여/꽃숭어리 한 모감을/던져 주어 보아라.”(*'여수어라’는 엿보거나 지켜보라는 의미의 전라도 말, 시인 전유전 ‘붉은 꽃을 던져주라’ 全文) 

 "꽃 가지 발음하다가/때 아니게 눈시울이 시큰거린다/꽃과 함께 발음하면 ‘가지’는 ‘까지’가 된다/꽃가지도 예쁜데/꽃까지는 얼마나 지극한 경지냐.”(복효근 '꽃가지' 全文).


엄동설한 견뎌내고 그 지난한 시간이 흐른 후에, 봄 되면 꽃을 피우는 나무들의 강인함을 다시금 생각케 됩니다. 오동도를 뒤로 하고, 2012년 열렸던 여수 세계엑스포 인근 해안가 조형물 앞에서 한동안 바다를 바라봤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세렌디피티’가 신경주역이라는 장소에서 연유된 것이라면, 봄꽃이라는 자연을 통해 기대 이상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도 또 하나의 ‘세렌디피티’라고 할 수 있겠죠.


하여간 벚꽃과 동백, 두 꽃의 가장 큰 차이라면 꽃이 질 때의 광경일 것입니다. 벚꽃은 한 잎 한 잎 바람에 날려 눈처럼 떨어집니다만, 동백은 완전 개별투하식 입니다. 꽃송이가 뭉텅이 채로, 시들지 않고 우아하게 지는 꽃이지요. 꽃이 지고나야 새 잎 돋아나오는 것, 자연의 순리임을 목격하는 4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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