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일본어와 삼겹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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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일본어와 삼겹살

웹마스터

김희식

(주)건축사무소 광장 상무 



관객동원 400만 명을 흘쩍 넘어선 일본 애니매이션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요즘 한국 영화계를 주름잡고 있습니다. 무슨 연유일까? 궁금해서 며칠 전 강남역 인근의 영화관을 찿았습니다. 터치스크린으로 티켓을 구입하려는데 옵션이 뜹니다. (1) 한국어 더빙으로 된 영화를 원하면 4시, (2) 일본어 더빙에 한글자막으로 된 영화를 희망한다면 7시, 둘 중에 하나를 클릭하라는 겁니다. 필자는 (2)번을 골랐습니다. 입장후 장내 객석을 둘러보니 20, 30세대가 70%, 30,40세대가 20%, 나머지 10% 정도가 50대 이상으로 짐작됩니다. 젊은 층이 대세입니다. 빈 좌석 없이 만석입니다. 


필자가 본 애니메이션 영화라면 국민학교(초등학교)시절 종로 5가 동대문극장에서 본 ‘피노키오’가 유일했죠. 슬램덩크 원작인 만화책을 본 적도 없고 해서 호기심 반 기대 반 심정으로 스크린을 주시했습니다. 스토리 전개와 함께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주인공의 눈동자가 일반영화 속의 사람들보다 더욱 강렬했습니다. 수시로 변하는 몸놀림이나 그림으로 처리된 배경화면 등이 잠시도 쉴 틈 없이 관객들을 몰입하게 만듭니다. 배역의 이름들도 한국식으로 개명하고 짧으면서도 강한 어조의 자막들이 친근하고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일본이라는 국경을 넘어 한국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영화 같은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더더욱 젊은 관객몰이에 성공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지난 해 가을부터 주말이면 자주 찿아보는 유튜브 영상 중에 엔남(엔카 읽어주는 남자)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우연히 채널을 돌리던 중 발견했습니다. 엔카를 매주 한두 곡씩 선정하여 들려주면서 동시에 일본어로 된 노랫말을 풀이해 주는 방식의 동영상입니다. 필자가 이 프로그램을 애청했던 이유는 일본어 학습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없던 트랜드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유튜버 본인 소개에 의하면, 1980년 3년 간 일본 고베에서 직장생활을 했답니다. 퇴근 후 저녁에는 고베현 청사에서 청소년 대상의 한국어 클래스 강사로 자원봉사도 했는데 그때 즐겨 듣던 엔카에 심취한 것이 ‘엔남’이라는 타이틀로 유튜브 방송을 개설하게 된 동기랍니다. 매주 방송 후 수 십개의 댓글이 올라오는데, 일반인은 물론, 일본어 전공학생들도 다수 보입니다. 


어떤 문화권에 낯선 문화가 전파될 때 가장 쉽고 빠르고 거부감 없이 파고 들 수 있는 건 음식이나 언어라고 합니다. 실례로 ‘삼겹살과 가위’ 그리고 ‘한국어 능력시험’을 사례로 꼽은 문화비평가의 글 중 일부를

옮겨봅니다. "처음에 거부감을 가지던 문화가 어느 새 자연스레 일상에 전파되는 모습, 여기에는 어떤 정치적 배경도 프로파간다도 없다. 그저 경험해 보니 좋았고 맛있었다는 체감효용만 있을 뿐. 


그런데 왜? 갑자기 삼겹살과 가위가 일본에 새롭게 퍼진 것일까? 우리는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삼겹살을 먹었다. 삼겹살은 40여년 간 ‘서민의 고기’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하다. 우리에게는 결코 고급음식이나 고급 식문화가 아닌 삼겹살이 어떻게 일본인의 입맛을 사로잡았을까? 이유라면 2010년대 이후 급격히 상승한 한국의 경제수준과 대중문화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삼겹살을 바라보는 외국인에게 무언가 ‘쿨함’을 제공하고 있다. 한국이 쿨해 보이지 않았을 때에는 식탁 위에서 큰 고기를 가위로 써는 모습이 경박하게 보일 수 있다. 이제는 그 반대의 시대가 됐다. 다수의 일본인(그리고 다른 외국인)이 삼겹살을 불판에 굽고 가위로 자르고 쌈채소에 싸서 먹는 것을 쿨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런 인식의 전환이 삼겹살과 가위만 있을까? 이와 더불어 한국어 능력시험이야 말로 가장 대표적인 인식의 전환사례가 아닐까 싶다. 한국어 능력시험(TOPIK)의 경우 2017년에는 70개국 29만 명이 응시했는데, 23~24년에는 70만 명 이상으로 예상된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문화도 마찬가지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자연의 법칙은 변하지 않는다. 어제의 낮은 곳이 높아지는 것도 자연의 법칙이다.”(요즘, 일본, 공태희著, 2022년).  


최근 한일 정상회담이 열리면서 양국관계가 정상화 될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이 들립니다. 지난 주 발표된 대한상공회의소 SGI(지속성장 이니셔티브)보고서에 의하면, 한일관계 악화전후 대비 한국의 수출액이 연간 27억달러 정도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습니다. 양국간 안보, 정치, 경제, 외교를 포함해 문화 전반에 이르기까지 한일 간의 파트너십이 활발해 졌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서로 상생(Win-Win)해야 하는 지구상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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