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영수의 코미디 40년 연예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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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영수의 코미디 40년 연예비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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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태어난 화성인


남수원 사람들은 발가벗고 100리를 뛴다는 말이 있다. 칭찬인지(생활력이 강하다) 비난인지(목적을 위해 물불 안가린다)는 몰라도 하여튼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평리 101번지 바로 그 남수원에서 1952년 8월 8일 

저녁 6·25사변 통에 태어나다가 한쪽 발이 걸려서 난산 출혈이 심해져 산모가 위험했다. 사산아를 낳아야 한다는 의사에 맞서 어머님이 아이를 죽일 수 없다며 극렬 저항을 했다. 과다출혈로 혼절하니 완전히 맥이 풀려 쓰러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 틈을 타고 튀어나와 세상 땅을 밟은 이가 있어 그를 엄영수라 한다. 세상을 변화시킨 위인들의 출생신화와 거의 근접하지 않은가? 어머님이 실신하지 않았으면 난 죽었을 것이다. 어머님의 지혜에 감사드린다. 어머님!  이럴 때 나오는 노래 불효자는 울지 않습니다! 계산으로 합니다.


산모와 갖난 아이는 출산 후 후유증 때문에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상황이었다. 죽을 것 같아 출생신고를 미뤘는데 1년이 지난 후에 죽지 않고 똘망하게 숨을 쉬니 그제서야 1953년 생으로 신고가 돼서 1년 더 산다. 득 봤다. 현명한 아버님께도 감사드린다. 


유년시절 순 미제유치원을 다녔다. 인근 미군부대에서 천막, 시이소오, 그네, 풍금을 전부 미제로 공수했다. 우리시대에 초호화 특수 국제유치원 다닌 사람 별로 없다.


어머니께서 우측 사강에 조용필이 살고, 좌측 오산에 차범근이 살고, 앞 조암에 조항조가 살고, 뒤 정남에 박지성이 사는 바로 그 동네 정중앙에 측량도 안 해 보고 발안 땅 명당자리를 찾아 나를 낳으셨다. 중앙에서 둘러보니 대스타들의 어린시절 생활을 바로 컨닝해 그대로 흉내내서 살았더니 약간의 스타성이 생겼는데 그 덕분에 이렇게 개그맨이라도 해서 먹고사는 것이다. 우리동네 주변에 살던 한국의 최고 스타분들 더 없이 고맙다.


어머님은 천재셨다. 맹모삼천지교를 단 한 번의 이사도 없이 실천하셨다. 발안 초·중·고 시절에 우등생, 모범생, 수석입학, 학생회장, 반장만 해도 되는데 욕심이 많았다. 가출, 재수강, 자퇴, 휴학, 재입학까지 할 수 있는 건 원없이 다했다. 대학에 가자마자 사고를 쳤다. 데모에 앞장서고 민주화 한답시고 독립군인양 나라를 구할 것처럼 나대고 설치다 육군에 입대했다. 소양강 줄기타고 올라가서 '인제 가면 언제 오냐'는 인제땅에 떨어졌다. 


향로봉 밑 진부령에 근무할 때 강○○ 중위에게 안 죽을 때까지 맞았는데 그래서 결국은 안 죽었다. 가슴을 너무 맞아서 온몸이 새까맣게 멍이 들었다. 치료를 받았고 의무지대장이 위험상황이라고 대대장에게 보고했다. 당시 대대장은 10·26사태 가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관이었던 박흥주 대령이다. 자상하고 온화한 분이었다. "엄 병장  전방에 와서 고생한다. 많이 아픈가"라며 위로했다. 사실대로 답했다. "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좀 더 인간적인 사회가 되면 미투, 학폭에 이어 군폭도 까발려야 한다. 왜 가장 중요한 군폭에 대해서는 침묵하는가? 강 중위 오래 살아서 한 번 만나고 싶다. 강○○ 이라고 쓴 것은 명예훼손 문제로 겁이나서 감춘 게 아니다. 그날 머리도 많이 맞아서 기억력이 떨어졌다. 죽기 전에 반드시 이름을 기억해 내야하는데…. 강 중위가 투스타까지 진급했다는 얘기 전해 듣고서 연예인이지만 스타가 되고 싶은 생각을 접었다. 때린 놈은 투스타가 되는데 맞은 놈은 원스타도 못된다. 세상이 그렇다. 한 번 따져보자.


개구리복 갈아 입으며 살아 나왔으니 일단은 성공이다. 제대할 때는 누구나 천하가 내 꺼 같고 무슨 일이든 큰 일 할 것 같은 자신감이 있었는데 정말 큰 일을 쳤다. 바로 서울시청 쓰레기 운반차에 치여서 그것도 왕십리서 발등 깨지고 엄지가 날아가는 평생의 장애를 입게 된다. 의사 선생님 잘 만나 그래도 표시안나게 절지 않고 잘 걷게 돼 불행 중 다행이다.


81년 MBC 개그콘테스트에서 금상을 받아 방송에 데뷔했는데 그때 벌써 29세 개그맨 할배 한계연령이었다. 최양락, 이경규, 김보화, 이상운, 김정렬, 김종국 어린 것들과 MBC 1기 동기가 됐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내고향 화성, 세계적인 갯벌로 유명하고 제암리 3·1운동 유적지가 있고 매향리 미군 사격장이 남북분단의 아픔, 민족의 한을 말해준다.


고물장수 아버님 때문에 전투기 야간사격시 조명탄 불빛 아래서 포탄 껍질 줏으며 사선을 넘나들었는데 당당하게 안 죽고 멀쩡하다. 동작이 빨랐던 거다. 초음속 전투기에게 배웠다. 그래서 '다다다다' 하는 말재주가 생겼고 말이 매우 빨라졌다. 빨라도 다 알아듣게 정확히 발음하는 게 기술이다.  


훌륭한 코미디언이 되려면 어릴 때 꿈을 많이 갖고 자연환경 속에서 휴머니즘을 익혀야 한다. 대가족제도의 인간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될 수 있는 한 온천지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꿈을 많이 꾸어야 한다. 초등학교시절 넝마주이를 한 경험, 도시로 가출하여 스스로 자립한 개척정신 이런 것들이 경쟁력을 키웠다고 생각한다.


엄청나게 발전하는 명품도시 화성의 아들 엄영수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물론 화성시 홍보대사 당연한 것이고, 한국방송코미디언협회장 13년, 그 전에 KBS MBC SBS 코미디언 연합회장 11년, 합계 24년 협회장을 했고, 지금도 하는 중인데 금년에  선거가 있다. 선거하면 또 된다. 종신 나만 하는 것이다.


900명 코미디언이 대부분 가난하다. 방송은 겨우 150명만 하니까 나머지는 실업자다. 회비를 걷을 수 없다. 협회 살림을 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드는데 회장이 하는 업무 중에 가장 큰 업무는 자금마련이다. 24년간 회원기부를 한푼도 못받았는데 최근에 작고하신 송해 선생님 유가족이 1억, 강호동 개그맨 2억, 김구라 1천, 안영미 3천만원을 협회에 기부했다. 계속 성금이 답지하고 있다. 희망적이다. 이참에 코미디센터를 건립하는 것은 어떨까. 너무 나갔다면 좀 참았다 하겠다. 


방송국에 와서 한 일이 좀 있다. 방송문화예술단체 중 가장 늦게 2010년에 유인촌 문광부장관의 협조를 받아 코미디언협회를 만들었다. 코미디언실 내에 집합문화를 청산해서 폭력선배를 탄핵해 후배들을 편하게 해주었고, 기수문화 폐지해서 나이든 코미디언 예우에 앞장섰다. 어려운 사람 수술도 시켜주고 생활비도 조달해 주었다. 코미디언협회에 셀프 기부를 하여 3억3천만원의 헌금도 했다. 그래서 노후자금 없고 살림 거덜났다.


나라를 일으킨다는 신념으로 전립선 약하신 분에게 전속회사에서 제가 선전하고 있는 쏘팔매토 코사놀 킹파워골드를 100세트 지원받아 전립선을 바로 세워주었다. 돈이 없어 가발 못쓰는 사람에게 내가 촬영 때 한두 번 사용했던 거지만 새거나 다름없는 가발과 신형 새 가발을 합쳐서 50여 명에게 새 생명을 주었다. 머리를 줬으니까 대단한 일이다.


3번의 결혼에 성공했고 두 번의 이혼에 성공했고 계속 성공신화를 이어가며 허준영 경찰청장 시절에는 경찰청이 선정한 바른 가정 지킴이로 선정됐다나 어쨌다나. 이유는 헤어져도 늘 살던 집을 그대로 지키고 산다고…. 그것보다는 남자들이 헤어지면 쫓겨나고 열악해지고 좌절하는데 별탈 없이 살던 집에 변함없이 집 잘 지키고 재기하니까 격려 차원에서 했던 거 같다.


갈 때가 다가오는 것을 문득문득 느끼는 나이 70을 넘어서면서 징검다리 건너 듯 살아온 길을 대충 돌아보았다. 한 개그맨이 겪은 연예계 50년 동안의 희노애락을 갖고 가봐야 천국에서는 짐만 되고 쓸데도 없을 것이라 연예계 야사 비사 아사 모두 털어놓고 가볍게 가고 싶다. LA에서 하려는 건 한국에서는 계기가 없었을 뿐이다. LA건 서울이건 장소가 아니라 재미가 문제다.


공개되지 않은 부조리, 살면서 나만이 느끼는 아쉬움, 주고받으면 웃음이 나올 것 같은 이야기, 떠도는 이야기, 남기고 싶은 미담을 모아 보겠다. 사력을 다하지 않아도 어차피 인생은 매일 조금씩 깨져가고 있으니 생력을 다해 살려 보려한다. 많은 기대와 성원을 부탁드린다. 지면을 내주신 조선일보 LA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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