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궁금한 건 직접 답 찾도록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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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궁금한 건 직접 답 찾도록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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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최초로 연방상원의원에 당선된 앤디 김 당선인이 지난 5일 뉴저지주 체리힐의 더블트리 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당선소감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앤디 김 부친 김정한씨 인터뷰

끈기와 열정도 '부전자전'

연세대 의대 졸업, 국비장학생

"이민 1세대로 옛 생각하면 뭉클"


-아들의 당선을 보는 심정이 남다를  것 같다.

“옛 시절이 떠오르더라. 우리부부는 경남 밀양 사람이다. 나는 내이동, 아내는 부북면 출신으로 고향에서 만났다. 연세대를 졸업하고 1970년대 초 미국 유학을 왔는데 그 땐 한인사회 사정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상원은 고사하고 하원의원조차 한명 없었으니까.

(1992년 선거에서 캘리포니아주에서 출마한 김창준 후보가 한인 첫 연방하원의원이다.)

-첫 한인 연방상원의원 탄생으로 한국계 미국인들의 정치적 위상이 높아지리라는 기대감이 큰데.

“우리는 미국에 살지만 한국인이라는 밑바탕은 절대 바뀌면 안되고 바뀌지도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 부부는 이런 생각이 강했기 때문에 아내가 아이들에게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시켰다. 한국 시를 읽어주기도 했다. 다만 한국에 잠시 다녀와보니 아이들이 영어를 잊어버렸더라. 깜짝 놀라 그때부터는 주로 영어만 쓰게 했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적은 없었나.

“내 전공을 눈여겨보고 당시에 한국 굴지 대기업에서 스카우트를 제안했다. 조건도 정말 좋았다. 미국살이가 녹록지 않아서 아들이 유치원 다닐 때 한국에 갔다. 그런데 그 당시 한국 학교들은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에 몰두하고 있었다. 생활여건은 좋아질지 몰라도 아이 장래를 생각하면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금방 돌아왔다.”

2018년 앤디 김이 연방하원이 되면서 아버지 김씨의 인생사도 주목받았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데다 소아마비를 앓아 몸이 불편한 녹록지 않은 여건에서도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뒤 국비장학생으로 미국에 유학했다. 밀양 사람들은 김정한씨를 ‘시련을 이겨낸 수재소년’으로 기억했다. 밀양중을 함께 다닌 안경환 서울대 명예교수는 “정한이는 어렸을 때 부모를 잃고 인쇄소를 하는 삼촌 집에서 살다 서울의 고교로 유학 갔다”며 “당시 서울대가 장애학생을 잘 받아주지 않아 연세대에 진학했다고 기억한다”고 말했다. 서울생활이 여의치 않았던 김씨는 고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로 대학에 입학했다고 알려졌다. 

-자식 농사에 크게 성공했다. 자녀 교육 철학이 있다면.

“아이들에게 공부를 언제 얼마나 하라고 시시콜콜하게 말한 적이 없다. 공부는 필요를 느끼는 사람이 스스로 해야한다고 생각해 공부를 왜 해야하는지 알아서 생각하게 하려고 애썼다.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방법 중 하나는 좋은 학교 근처에 살거나 그 학교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맹모삼천지교(맹자 어머니가 아이 교육을 위해 세 차례 이사한 일)’와 비슷하다. 특히 프린스턴대와 하버드대에 자주 갔는데 학교 캠퍼스엔 공부하는 분위기가 흘렀다. 

-아들이 어떤 정치인이 되길 바라나.

“아들의 정치활동이나 정책에 대해선 내가 할 말이 없다. 아들은 이미 좋은 정책을 만든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상원에서도 잘 하리라고 믿는다. 한국에서도 많이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다. 

뉴욕=윤주헌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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