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이야기] 크리스마스, 겸손, 그리고 경외


홈 > 로컬뉴스 > 로컬뉴스 > 오피니언
로컬뉴스

[교육이야기] 크리스마스, 겸손, 그리고 경외

웹마스터


제이슨 송

뉴커버넌트 아카데미 교장 


크리스마스는 우주의 창조주가 피조물의 세상에 겸손히 찾아온 이야기다. 겸손의 뜻은 "낮음", "바닥에 낮게 엎드림"이며, 자부심과 오만함에서 자유로운 자만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이다. 겸손은 사실 타고난 성품이 아니다. 불편한 선택이다. 승자, 최상위 포식자, 부요한 자, 더 큰 영향력을 가진 자로서 타인을 지배하고, 권력을 과시하며 우쭐거리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이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없을 때, 즉 갑질을 당할 때, 인간은 격노하고 질투한다. 자, 그런데 온 우주의 최고 권력자가 겸손을 택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역설 중 하나다.


예수는 부유하거나 저명한 가정에 태어나지 않았다. 로마가 요구한 호적 등록 때문에 강제로 긴 여행을 하다가 빈방이 없던 한 여관의 후미진 헛간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는 여물통에 뉘어졌다. 아니, 만유의 왕이 그런 허드레한 곳에 태어났다고? 이게 말이 되는가? 하지만, 우연이 아니었다. 창조주의 의도적인 결정이고, 신성한 겸손의 행위였다.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인류를 포용하기 위해 신께서 자신의 고귀한 특권, 권력, 지위를 포기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겸손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인가? 당연히 매일 더 겸손해지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에 대해 덜 집착하고, 반대로 타인의 필요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그래서 부여받은 능력과 재능과 물질을 기꺼이 나누는 것이다.


나아가 크리스마스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경외심을 회복해야 한다. 누가복음 2장 8, 9절에 따르면 목자들이 밤에 양 떼를 돌볼 때 큰 빛과 천사가 나타났고, 그래서 그들은 충격을 받아 벌벌 떨었다.


현대인이라고 달리 반응했을까? 천사는 작은 날개를 달고, 하프를 연주하며, 사랑의 화살을 쏘는 통통한 곱슬머리 아기가 아니다. 천사를 만난 사람들은 두려워 떨었고, 신으로 착각해 엎드려 경배했다고 성경은 말한다. 미가엘은 전사(戰士) 또는 장군으로 묘사된다. 이사야서에는 천사가 여러 개의 날개로 날아다녔고, 천둥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고 한다. 그런 천사가 눈앞에 나타나면 당연히 두렵고 떨 것이다. 


천사의 출현과 함께 나타난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데, 성경은 이것을 찬란한 구름이나 불타는 빛으로 말하며, 이 빛이나 광채가 깜깜한 밤에 찬란히 드러났기에 목자들이 뒤로 움츠리거나 비틀거리며 눈을 가렸을 것이고, 두려워 떨며 고꾸라졌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태도,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두려움을 느끼고, 놀라고, 아니 까무러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크리스마스가 “그리스도와 만남”을 의미해도 우리는 크리스마스에 대해 놀라거나 경외를 표현하지 않을까? 크리스마스의 상업화, 크리스마스 사건에 대한 불신, 또 예수를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외감을 잃고 무뎌져 있기에 그렇다.


인간은 자연을 보고 신의 손길에 감격한다. 그랜드캐년, 요세미티, 옐로스톤, 브라이스캐년, 나이아가라 폭포, 그리고 LA 인근 조슈아트리 국립공원에서 망원경 없이 은하수를 직접 보았다면 분명 “와우!” 내지 “오 마이 갓” 같은 표현으로 놀라움과 경외를 표현했을 것이다. 웅장하고 멋진 장관은 우리의 기대나 설명, 또 언어적 표현을 초월한다.


한데, 이런 명소가 아무리 대단해도 예수가 태어난 날 밤 목자들이 목격한 장면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자연보다 위대한 분, 자연을 창조한 존재가 사람에게 다가왔다. 신이 시간과 공간과 인류 역사에 개입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예수의 탄생이 진짜고 사실이라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신앙인은 겸손히,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그를 예배해야 할 것이다. 신앙인이 아니라면 이번 크리스마스가 마지막일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진지하게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숙고해 봐야 할 것이다. 인류 역사의 전환점인 예수의 탄생을 그냥 무시하고 지나는 것 만큼은 절대 해선 안 된다.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