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10월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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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칼럼] 10월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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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 근 

변호사 / 숙명여대 석좌교수  


 

9월이 갑자기 사라졌다. 정신없이 흘러간 한 해와 함께 9월이 언제 왔다 언제 갔는지 모를 만큼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10월, 모처럼 선선한 공기가 온몸을 휘감싸는 이 가을도 그렇게 눈 깜박할 사이에 훌쩍 날아가 버릴 것인가? 아니다. 한여름 같던 올 9월은 흐르는 땀 닦아내느라 시간 흐르는 줄 몰랐지만, 가을이 벼 이삭처럼 익어가는 10월에는 청청한 하늘, 에어컨보다 더 서늘한 솔바람, 그리고 붉디붉은 단풍이 꽤 살맛 나는 계절을 풍성하게 열어줄 것이다. 


가을 단풍은 찬란하지만, 아름답기보다는 차라리 서글프다. 화려한 꽃들 시들고 마지막 잎새마저 떨어뜨려야 할 쇠락의 시간… 소멸을 예비하는 수의(壽衣)처럼 애절한 단풍은 죽음을 앞둔 여인이 그 처절한 아픔을 곱게 감추고 꾸미는 최후의 치장이다. 


“단풍나무, 붉게 물들고 있었지요…/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부끄러운 날들 이어지더니/ 가을이 오고 말았지요… 내 낯빛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뻔뻔해질수록 가을산마다/ 단풍나무 붉게붉게 물들고 있었지요”(김현주 ‘단풍나무’) 붉디붉은 단풍은 뻔뻔했던 내 지난날의 삶을 꾸짖는 듯 나 대신 얼굴 붉히며 절절한 참회의 고백을 쏟아낸다. 이토록 간절한 참회의 자리를 펴본 적이 있었던가? 


온통 붉게만 보이는 가을 숲은 가까이서 보면 온갖 색깔이 다 함께 모여 있다. 노란색 주황색 연두색 밤색 갈색… 심지어 사시사철 푸르기만 한 소나무 전나무 동백나무 대나무도 울긋불긋한 단풍들 곁에 싱싱한 초록빛으로 함께 서 있다. 산과 숲에 시뻘건 빛깔만 가득하다면 단조롭기 짝이 없겠다. 아니, 소름 끼치도록 섬뜩할 게다. 


온갖 빛깔이 함께 어울리며 섞여 있는 단풍철은 기이하기 그지없다. 무엇보다 가을 숲은 선동을 알지 못하기에 더욱 이채롭다. 가을은 하나의 빛깔만을 강요하며 선동하지 않는다. 하나하나의 나뭇잎은 자유로이 제 빛깔을 뽐내고 있지만, 또 다른 빛깔의 나뭇잎들과 어울려 숲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꾀꼬리들의 제창(齊唱) 소리만 들리는 숲은 적막할 뿐, 온갖 잡새들이 한데 어울려 지저귀는 합창이라야 숲은 더 아름답고 충만해진다. 자유와 공화(共和)의 어울림… 자유 안의 공화, 공화 속의 자유가 단풍철의 미학(美學)이다. 가을 숲은 배제나 비방이 없는 자유사회, 독선도 선동도 없는 공화의 공동체다. 


선동의 끝은 반(反)자연적인 획일주의 사회다. 자연은 획일화를 모른다. 획일화는 자연스레 아우르는 질서가 아니라 인위적 억압의 구조, 우주의 섭리를 거스르는 인간의 본성적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사물의 인식이나 가치판단의 기준을 획일화하려는 본성적 경향이 있다. 개인이 아닌 대중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선동에 취약한 대중심리는 체질적으로 다양성을 거부하기 마련이다. 획일화된 표준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훨씬 편할 뿐 아니라 위험부담도 적기 때문이다. 


대중의 집단의사는 여과되지 않은 감성이나 눈앞의 편의성 또는 원초적 이해관계에 따라 획일적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유와 개성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오히려 유행의 노예가 된 듯 획일적인 모습을 좇아가는 이즈음의 세태는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개성과 다원화의 시대인 21세기가 선동과 유행에 따라 대중의 감성적 획일주의에로 회귀하는 듯한 현상은 아이러니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 획일주의가 비록 ‘권력에 의한 위로부터의 획일화’가 아니라 ‘대중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획일화’라 해도…


10월이 오면, 벼(禾)에 불(火)을 붙이는 계절 가을(秋)이 깊어진다. 10월은 나뭇잎에 불을 붙여 단풍 숲을 만들고, 내 마음에도 불을 붙여 참회의 용광로를 시뻘겋게 달군다.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사는 것 아니었다… 부끄러운 날들 이어지더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뻔뻔해 질수록… 내 마음 속 참회의 용광로는 벌겋게 불타오르고 있다… 내 자유를 아끼면서 남의 자유를 업신여기지 않았던가? 정치적 선동과 무리본능에 휩쓸려 공화의 어울림을 가로막지 않았던가? 10월 단풍 숲 앞에 부끄러이 고개를 떨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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