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시니어] “베푸는 삶이야 말로 축복의 비결입니다”
이덕화 권사는 한인타운 봉제업계의 산증인이자 초기 한인 이민여성의 대모이기도 하다. / 이훈구 기자
한인타운 봉제 업계 산 증인 새한교회 이덕화 권사
탈북민 1호박사 ‘이애란박사’ 직접 탈북시켜 화제
이덕화(Lily Lee, 86)권사. 이름이 대한민국의 유명배우와 같다. 배우 이덕화씨가 터프가이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면 동명이인 이덕화 권사는 여장부다. 지금도 봉제업계에서는 이권사의 ‘전설’을 기억하는 이가 적지 않다. 그녀는 자바도 존재하지 않던 시절 초창기 봉제업에 뛰어 들어 미국회사들의 하청을 도맡았던 인물이다. 처음에는 저 분이 누구신가 하다가 6 ·25 참전유공자회 미서부지회 이재학 회장의 부인이라는 이야기에 놀라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봉제업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었음을 알고 한번 더 놀라게 된다.
한국에서는 고려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결혼 후 세자녀를 키우는 평범한 전업주부로 살았다고 했다. 1968년 캐나다 정부 초청으로 기술이민을 왔으나 1969년 캘리포니아로 이주하면서 취업전선에 뛰어 들게 되었다. 유대인이 사장인 봉제공장에 취직이 되었는데 여기서 그녀의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재봉틀 기술은 없었지만 똑소리 나는 일 처리에 당시 아시안계 여성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강점이 있었다. 영어로 의사소통이 잘 되고 운전까지 능숙했기 때문이다. 사장은 이권사에게 매니저 일을 맡기면서 한국인을 고용해도 좋다고 지시했다. 성실함에 있어서 한국인은 지구촌 최고다. 이권사의 활약이 두드러진 것은 분업화(section work)를 통해 일의 능률을 올린 일이다. 재봉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단추부터 달게 하는 등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이에 반한 유대인 사장은 아예 100여명을 데리고 봉제공장을 직접 경영하라는 제안을 했다.
이후 30여년간 여성의류만 취급하면서 미국회사들의 용역을 도맡아 처리했다. 1980년에는 2만 8천 스퀘어피트의 공장을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한때 하루 1만 달러씩 수익이 생기니 IRS에서 특별감사를 받았을 정도였다. 이권사가 한인사회에 기여한 것은 이민 초기 여성들을 고용해 가족을 서포트 하게 한 것. 게다가 분업화 시스템에 시급도 좋았기에 오버타임 근무를 위해서 새벽부터 출근하여 야근까지 하는 억척스러운 직원들도 수두룩 했다고 한다.
#. 신앙과 베푸는 삶
미국 봉제 회사들이 줄을 서서 일감을 몰아줄 때도 이권사는 교만하지 않았다. 처음 이민생활의 정착을 돕기 위해 전도를 시작했고 교회(새한교회)를 섬기는 일에도 최선을 다 했다. 1978년에는 주도적으로 교회 건축도 했다. 남편을 서포트 하기 위해6 ·25와 관련된 행사들을 후원하고 재향군인연합회 송년회 등도 했다. 이런 저런 어려운 분들을 돕고 하는 동안 자녀들이 축복을 받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는 이권사의 세 자녀는 모두 성공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첫째 딸은 검안의, 둘째 딸은 작가, 셋째인 아들은 노스할리우드에서 대형 녹음실을 운영하며 유명 뮤지션들의 음반작업에 참여했다. 또한 남들은 생애 한번도 하기 힘들다는 필사성경을 무려 3권이나 직접 완필하여 자녀들에게 나눠주었다.
#. 탈북 요리연구가 이애란 박사의 고모
특별히 이권사는 ‘능라밥상’으로 유명한 탈북인 1호 박사인 ‘이애란 박사’의 고모다. 고모로써 1997년 11월에 이애란 박사를 비롯한 가족 9명을 직접 탈북시켰는데 정착에 성공한 탈북민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평양출신인 까닭에 ‘평양냉면’과 ‘녹두빈대떡’을 즐긴다는 이권사는 점심을 든든히 챙겨 먹되 아침과 저녁은 소식을 한다. 새벽기도로 시작하는 하루 일과 중 반드시 두뇌회전을 위해서 성경 필사를 하는데 3권을 직접 손으로 쓴 이후부터는 컴퓨터로 작성하고 있다. 봉사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이권사는 오늘도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 힘쓰고 있다.
이훈구 기자 la@chosun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