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크리스마스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이 우 근
변호사 / 숙명여대 석좌교수
누군가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이제껏 크리스마스는 단 한 번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다 기념일일 뿐이다.” 지구촌 곳곳의 세밑을 휘황찬란하게 밝히는 오늘의 크리스마스가 2천여 년 전 베들레헴 마구간의 성탄절인가, 아니면 그 기념일에 불과한가가? 성탄절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성당과 교회당에서 울려 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럴 속에? 사랑하는 이들끼리 주고받는 크리스마스 카드 안에? 백화점의 화려한 크리스마스 트리에?
아닐 게다. “마음속에 크리스마스가 없는 사람은 나무(크리스마스 트리) 밑에서도 그것을 결코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로이 스미스의 섬뜩한 지적이다. 영성(靈性)이 사라진 자리에 화려한 기복(祈福)의 전당들이 솟아오른다. 소외된 이들을 향한 사랑의 소명을 저버린 채 부유하고 화려해진 제도종교들, 내실 없이 소란스럽기만 한 짝퉁 성탄절은 크리스마스의 기념일조차 되지 못한다.
성탄은 기적이다. 신앙의 기적이 아니라면, 크리스마스는 정녕 희대의 난센스일 것이다. 억압받는 식민지 유대의 변방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난 가난한 목수의 아들, 살인강도의 사형수 한 사람을 마지막 친구로 둔 채 십자가에서 쓸쓸히 죽어간 나사렛 예수, 그가 오고 오는 뭇 세대로부터 ‘구세주’라는 고백을 받는다는 사실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기적, 신비롭기 짝이 없는 역설이다.
<광기(狂氣)의 역사>를 쓴 미셸 푸코는 ‘인간의 무한한 권력욕‧소유욕이 인류문명의 위기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천박한 탐욕의 광기가 나라와 사회의 평화를 집어삼킨다. 이즈음의 우리 상황이 겹쳐온다. 양심을 내세워 비양심적인 대결을 일삼으며 서로 물고 뜯는 이 사회에 기어이 어떤 불행이 닥치지 않을까? 군대의 힘으로도, 군중의 함성으로도 막을 수 없는 불행이… 자기의 도덕성을 내세우는 것처럼 부도덕한 일이 없고, 자신의 정의로움을 떠벌리는 것만큼 정의롭지 못한 일도 없건만. “나는 늘 옳고 너는 항상 그르다”는 오만으로 국민통합을 깨트리고 있지 않은가? 새벽안개 걷히듯 덧없이 사라질 그 교만과 위선으로….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운 가난한 영혼, 고난을 짊어지는 ‘자기 비움’의 희생에서만 평화의 싹을 틔울 수 있다는 것이 성탄절의 메시지다. 크리스마스는 일체의 가치를 뒤엎는다. 높은 자가 낮아지고, 낮은 자가 높임을 받는다. 화려한 왕궁이 아니라 시골여관의 말구유가, 성전의 지성소가 아니라 목자들의 황량한 들판이, 대제사장의 준엄한 호통이 아니라 이방인 동방박사들의 고단한 발걸음이 성탄의 참뜻을 고이 품고 있다.
“생명의 빛이 어두움 속에 비치었으나 어두움이 그 빛을 깨닫지 못하였다.”(요한복음 1:5). 메시아의 탄생은 우리의 어두운 영혼을, 거짓된 삶의 자리를 깊숙이 뚫고 들어오는 방어할 수 없는 빛의 도전이다. 유대 왕 헤롯과 로마 총독 빌라도, 대제사장 가야바와 성전종교의 지도자들, 그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이 힘을 합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예수가 던지는 빛의 도전을 저들의 어두운 영혼이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종교가 진실의 빛을 잃으면, 거짓과 탐욕의 무리가 세상을 지배한다.
그렇지만 과연 저들뿐일까? 우리의 어둡고 거짓된 삶을 폭로하는 강렬한 빛, 그 영혼의 떨림 앞에서 과연 누군들 평화로울 수 있을까? 베들레헴의 말구유는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를 바라본다. 메시아가 마구간에서 첫 숨을 내쉰 것은 스스로를 비우는 자기 비움, 골고다로 향하는 첫걸음이었다. 말구유의 자기 비움은 십자가의 자기 비움에서 완성된다.
성탄전야의 들녘, 천사들은 ‘하늘엔 영광, 땅엔 평화’를 노래했다. 그 노래는 골고다 언덕, 십자가의 고난을 향한 출발의 전주곡이었다. 메시아의 탄생은 이미 희생의 죽음을 품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의 왜곡된 현실을 깡그리 태워버리는 번제(燔祭)의 불길, 근원적인 변화와 쇄신을 요구하는 피할 길 없는 충격, 그 거듭남의 카이로스로 다가오는가? 아니면, 그저 2천여 년 전 한 아기의 탄생을 기념하는 크로노스의 시간으로 지나갈 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