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훈의 속닥속닥] 늦장마와 동동가을
과연 백로(白露)다. 아직 대낮엔 햇볕이 쨍한데 아침 저녁나절엔 제법 선선한 게 그 지긋지긋하던 무더위가 언제였나 싶다. 대기 중의 수증기가 밤기운에 엉겨 풀잎에 이슬이 맺힐 법하다. 미국 동부에선 하늘에서 나이아가라가 쏟아졌느니 난리법석인데 이곳에도 비가 질기게 뿌린다. 그래도 어쩌다 하늘이 열리는 날엔 먹구름 대신 새털구름이 높게 걸리고 산과 들에도 옅기는 하지만 어느 결에 가을색이 조금씩 스며들어 풀들의 기세가 한풀 꺾이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매미 소리도 말매미나 참매미, 쓰르라미, 애매미, 유지매미의 힘찬 아우성이 아니고 털매미나 풀매미의 속삭임이다. 논에는 벼가 누릇누릇 익어 가고 울에 붙어 자란 대추나무엔 닥지닥지 열린 열매마다 자위가 돋고 있다. 산자락엔 벌써부터 도토리를 사냥하는 청솔모의 몸짓이 날랜 가운데 밤송이가 한껏 둥글어 한 열흘이면 아람을 벌 태세이고, 털북숭이 수크령이 하늘거리는 사이사이로 여리여리하게 뽑아 올린 연분홍 무릇 꽃이며 소담스레 핀 맥문동 꽃과 만지면 톡하고 터지는 씨앗을 준비하는 물봉선, 자잘한 꽃무리가 사랑스런 고마리· 여뀌 꽃이 여기저기서 가을을 맞이하고 있다.
# 백로는 24절기 가운데 열다섯 번째로 처서(處暑)와 추분(秋分) 사이에 찾아온다. 음력으론 대개 8월 초에 들지만 윤달이 끼면 7월 하순에 들기도 한다. 이 무렵엔 대개 장마가 걷힌 뒤라 맑은 날씨가 이어진다. 세벌매기를 마치고 이삭거름까지 주고나면 벼는 배동이 지기 시작해 하늘이 도와주면 그대로 여물어 풍년이 들게 마련이다. 한여름을 견뎌낸 고추도 새빨갛게 때깔을 입힐 테다. 농사의 9할을 마친 셈이다. 농가에선 잠시나마 일손을 놓고 한숨을 돌린다. 예전엔 음력 7월 보름을 백중(百中)이라 하여 머슴을 쉬게 하고 돈을 주어 놀게 할 만큼 큰 명절로 삼았는데 백중날 농촌에서 놀던 갖가지 놀이를 ‘호미씻이(洗鋤宴)’라 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어정칠월’이다. 조상들 묘에 벌초를 하고, 아낙들이 짬을 내 근친(覲親:친정나들이)를 하는 것도 이때다.
#‘어정칠월’에 이어지는 건 ‘동동 팔월’이다. 칠월엔 어정거리며 보내도 되지만 팔월이 되면 어림없다. 김장 채소를 심어야 하고 온갖 곡식을 거둬들여야 하니 고양이 손도 빌리고, 죽은 스님을 불러 세워도 모자랄 판이다. 그래서 앞집 개똥이네도 동동, 뒷집 언년이네도 동동-, 내남할 것 없이 죄다 동동거린다. 예전엔 정말 그랬다. 하지만 요즘엔 농번기에 손이 달려서가 아니라 다른 일로 동동거린다. 바로 늦장마 때문이다. 음력으론 8월, 양력으로 9월에 태풍과 함께 쏟아지는 비는 정말 무섭다. 농심을 까무러치게 하는 염라대왕이다. 기껏 다 지어놓은 농사를 수확을 턱밑에 두고 한순간에 망치게 하는 극형(極刑)이다. 비바람에 쓰러진 채 물에 잠긴 벼에서 싹이 트고, 출하를 앞둔 사과나 배가 과수원 바닥에 떨어져 뒹굴면, 한껏 장하게 자란 고추가 포기째 쓰러져 불그뎅뎅 약이 오르다말고 희나리가 되면 농심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성하겠는가?
#늦장마의 원흉은 가을 태풍(颱風)이다. 태풍은 최대풍속이 초속 17m 이상의 바람으로 본질적으론 열대성 저기압이다. 필리핀 근처 등 북태평양 서부에서 발생해 북서쪽으로 오다가 대만이나 남중국해 부근에서 편서풍의 영향을 받아 포물선을 그리며 일본과 우리나라로 향한다. 강한 바람과 함께 많은 비는 물론 천둥 벼락을 동반해 곳곳에 큰 피해를 낸다. 태풍의 영어이름은 ‘Typhoon(타이푼)’으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불기둥과 폭풍우를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의 거대한 괴물 ‘티폰(Typhon)’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은 관찰을 통해 바람이 일 년 내내 여덟 방향으로 돌아가며 분다고 여겼다. 이른바 팔풍(八風)이다. 하지 때 남풍(景風)이 불기 시작한 지 45일 째 되는 입추부터 추분까지는 서남풍이 부는데 이를 양풍(凉風)이라고 한다고 했다. 이게 바로 가을 태풍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가을 태풍 가운데 대표적인 게 그 유명한 ‘사라(Sarah)호’ 태풍이다. 1959년 9월15일 사이판 섬 부근 해역에서 발생해 17일 한반도에 도달해 18일까지 전국을 강타, 849명이 숨지고 2533명이 실종됐으며 37만3459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선박 1만1704척이 파손되는 등 재산피해도 2456억 원에 달해 한국전쟁의 상처에서 어렵게 일어서려는 한국인들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더구나 17일은 추석날이어서 차례를 지내다 지붕이 날아가고 사람이 숨지는 등 전국을 할퀴고 지나가 특히 상실감이 컸다. 1904년 한반도에서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래 당시까지 가장 규모가 큰 태풍(5등급)으로 그 때의 한(恨)을 고스란히 담은 노래가 바로 「눈물의 연평도」이다. “조기~를 듬뿍 잡~아 온다던/ 그 배~는 어이하여 아니~오~나(중략) 눈물~의 연평~도~(1절)/ 태풍~이 원수더~라 한 많은 사~라~호/ 황천~ 간 그 얼굴 언제 다시 만나보~리(2절 하략)”
2002년 8월 30일~9월 1일까지 사상 유례가 없는 강풍과 집중호우를 동반해 전국을 강타한 제 15호 태풍(4등급) ‘루사(Rusa)’, 1년 뒤인 2003년 9월 12~13일까지 한반도 남부를 강타해 사망 실종 132명, 이재민 6만1000여명의 인명피해와 4조7000억여 원의 재산피해를 낸 제 14호 태풍 ‘매미’(5등급), 그러께, 그러니까 2019년 9월 2~8일 4등급의 위력으로 북한 전역을 휩쓴 제 13호 태풍 ‘링링(Lingling) 등도 손꼽히는 가을태풍이었다.
# 한 연구에 따르면 1954~2019년까지 66년 동안 이 땅에 영향을 미친 태풍은 모두 135개로 이 가운데 9~10월 발생하는 가을 태풍이 2000년대 전까지 20%에 불과하던 것에서 33.3%로 크게 늘었다. 2013년 이후 기후변화로 태풍시즌이 늦어지면서 가을 태풍이 느는 추세다. 최근에는 10월 태풍도 자주 온다. 또 지구온난화에 따른 해수온도의 상승으로 태풍의 위력도 점차 강해져 슈퍼 태풍이 늘고 있다. 특히 1959년 ‘사라호(號)’ 태풍 이후 한반도 영향 태풍 가운데 가장 많은 비를 동반한 태풍 10개 중 7개가 가을에 발생했다. 또 최대 순간풍속이 가장 높은 강력 태풍 순위 10개 가운데 5개도 가을 태풍이었다. 이러니 ‘동동 가을’이요 ‘온난화 동동’이 아니겠는가.
이만훈 칼럼니스트: 고려대 정외과를 졸업했다. 한국 중앙일보에서 경찰, 국방부 출입 등 사회부기자를 거쳐 문화재 및 인터뷰 전문기자를 지냈다. 향수를 자극하는 사투리나 아름다운 우리말 사용에 탁월하고 유려한 문장을 더해, 한국의 전통문화와 특산물 소개 등에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