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산책, 삶의 산책] 명함 속의 타이틀로 평가받는 나
최석호
(전) 가주하원의원
(전) 어바인 시장
사람을 새로 만나게 되면 우리는 보통 명함을 교환하며 인사를 한다. 이 명함의 유래는 이미 15세기에 중국에서부터 사람을 만나기 전에 자기 소개를 하기 위해서 미리 보내는 ‘방문카드’로 시작했다고 한다. 이 소개카드에 내가 누구라는 ‘신임장’을 소개해서 인정을 받아야만 엘리트계급의 사람을 만날수 있는 도구였다고 한다. 이 수단이 17세기 중반에 유럽으로 소개되어 엘리트층에 사용되었다고 하니 그 명함의 역사가 꽤 오래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오늘날에 유행하는 명함사이즈에 이르기까지는 단계적 변화 속에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요즘 같이 IT가 발전되어서 전자통신으로 많은 정보를 교환하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을 마주치는 장소에서는 이 명함교환처럼 빠르고 편리한 게 없다. 간혹 개중(個中)에는 ‘나는 은퇴해서 카드가 없습니다’라고 하는 사람들도 만난다. 그러나, 난감한 것은 카드교환을 못한 사람은 나중에 연락을 하고 싶어도 못 하는 경우가 많이 생기는 것을 보면 이 명함의 존재가치는 크다고 본다.
2022년 가주하원 4선 도전에서 미끄럼을 탄 후 나의 “주 하원의원”이라는 공식타이틀도 같이 사라지고 내가 쓰던 명함도 작년 12월 5일부터 함께 사라졌다. 이 타이틀이 떨어지자 바삐 돌아가던 행사참여도 갑자기 멈추게 되었다. 간혹 예전의 선약으로 남은 한두 행사에 불려 나가게 된 것이 전부다. 선뜻 깨닫게 된 것이 내 포켓에 남은 옛날 명함을 그대로 건네주지 못하게 됨을 깨달은 것이다.
새로 준비한 명함도 없기 때문에 내게 내미는 다른 분의 명함을 받으며 관례상 나도 옛 명함을 급조해서 내 이름만 남기고 쓰여있는 타이틀에 X표를 하고 명함교환을 했다. 아! 나는 이제 ‘아무도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머리에 스쳐간다.
시장이나 하원의원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내가 초청받아 참석하는 거의 모든 행사에서는 “축사” 라는 스피치를 하게 되는 것이 상례였는데 타이틀이 떨어진 후 참석하는 행사에서는 그런 기회가 없어지고 말았다. 나는 이제 ‘스피커’가 아닌 ‘청중’이 되는데 익숙해 져야함을 느낀다.
지난 24년 동안에 몸에 베인 VIP 취급을 기대하는 버릇을 고치는데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이제야 왜 사람들이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여러 단체들을 만들어서 “회장” “CEO” 등의 타이틀을 붙힌 명함들을 내미는지 이해가 갈만하다. 어떤 이는 아예 명함 뒤에 10개도 넘는 전·현직 타이들을 기재해서 나를 감탄하게 만든다.
사람의 존재는 '마슬로'(Abraham Maslow)의 인간이 갈망하는 다섯 단계 필요성을 추구하는 굴레 속에 억메여 사는 것이 틀림없다고 수긍이 간다. 아마도 명함 속의 ‘타이틀’은 인간이 추구하는 상당히 높은 네 번째 단계 'Esteem' (존경, 명예) 쯤에 속하는 필요성에서 비롯된 것 같으니 누구를 탓하랴.
이제 나도 새로 명함을 만들어야 하나? 그렇다면 무슨 타이틀을 써야하나 고민이다. 내 이름 밑에 (전) xxx, (전) xxx 라고 이 기사 저자를 표기한 것처럼 쓸 것인가, 아니면 나도 새로운 단체를 만들어 “회장”님 이라고 붙여 볼까?
아니면 명함도 없는 타이틀도 없는 무명인으로 살아 볼까? 선거에 낙선하고 무명인으로 사는 적응훈련을 하는 동안에 정치 판도가 급속히 바뀌는 현상에 따라 새로운 기회가 나타나서 지난 1월 23일 급기야 주상원에 출마한다는 발표를 하고 나니 명함 없는 나를 ‘상원 후보자’라고 소개가 시작되었다.
“나”라는 존재는 내 인격과 결부된 내 이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타이틀’이 있어야 나의 존재가치가 형성되나 보다라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현실을 무시해서도 안되겠다. 선거운동을 하면서 나를 소개할 때 편의상 어차피 내 명함을 내밀어야 하니 ‘상원 후보자’ 라는 타이틀을 내 이름 밑에 넣은 카드를 새로 만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