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이름을 바르게 하라
이 우 근
변호사 / 숙명여대 석좌교수
로마의 압제 아래 있던 이스라엘은 서기 132년 시몬이라는 영웅의 지휘 아래 로마 군대를 몰아내고 나라의 독립을 선포한다. 유대인들은 그를 메시아로 인정하고 ‘바르 코크바’(별의 아들)라고 불렀다. 그는 전투에 나갈 때마다 “신이여, 당신의 도움은 필요 없으니 방해만 하지 마십시오”라고 기도할 만큼 자만했다고 한다. 그러나 바르 코크바는 로마의 12만 대군에게 진압당했고, 그는 결국 패배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그를 ‘바르 코시바’(사기꾼의 아들)라고 바꿔 불렀다. ‘별의 아들’이 별빛을 더럽힌 사기꾼의 이름이 되고 말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김춘수 <꽃>) 모든 사물은 이름을 통해 비로소 나에게 의미 있는 관계적 존재로 다가온다. 최초의 사람 아담이 에덴동산의 사물 하나 하나에게 이름을 준 것은 의미 없는 고립된 존재를 의미 있는 관계적 존재로 이끌어낸 최초의 창조적 언어였다. 그래서일까,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무릇 어떤 주체의 이름은 다른 객체들과 구별 지으면서 그것의 지속적인 성질을 함축적으로 나타낸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이러한 지시‧식별‧지속‧함의(含意)의 기능을 올바로 수행하지 못한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않고, 말이 순조롭지 않으면 일을 이루지 못한다.” 공자의 정명론(正名論)이다. 서양의 일상언어 철학이 20세기에야 비로소 눈을 뜬 '언어의 수행적 기능'을 공자는 이미 2500년 전에 설파했다.
역사와 전통을 존중하는 보수는 과거의 그늘에 안주하거나 옛 시절로 돌아가는 뒷걸음질이 아니다. 역사의 바퀴와 전통의 채찍으로 미래를 향해 앞으로 달려가는 전향적(前向的) 에너지다. 역사의 지혜, 전통의 가르침을 시대변화와 조화되도록 새롭게 이어가는 것이 보수의 이름에 걸맞은 길이다.
보수를 외치면서 보수의 이름을 더럽히는 무리가 있다. 높은 자리에서 기득권을 누리며 엘리트의 우월감에 젖어있는 구닥다리 수구(守舊), 낮은 자리의 민초(民草)와 그네들의 한숨을 외면하는 늙은 보수는 미래를 내다보는 ‘역사의 진취적 시선’을 깨닫지 못한다. 역사의 광채가 미래의 희망을 밝히고, 전통의 빛이 앞길의 어둠을 걷어낸다. 역사의 광채, 전통의 빛, 민초의 목소리를 거스르는 퇴행(退行)은 보수의 가치가 아니다. 보수의 이름이 바르지 않은 것이다.
민족은 원래 보수의 가치다. 제 민족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인류애를 부르짖는 것은 위선이다. 민족은 선택에 따라 마음대로 벗어날 수 있는 울타리가 아니다. 역사의식에 뿌리박은 민족애는 인류애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민족 사랑이 극단으로 흐르면 나치즘이나 일본 극우파처럼 배타적 국수주의로 치닫게 된다. 히틀러의 아리안 민족주의가 유대인 대학살로 이어졌다. 다른 민족을 적대적으로 대하는 근시안적 민족지상주의, 그 뒤틀린 보수가 세계평화를 위협한다.
진보는 민족의 울타리를 넘어 세계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한다. 소외계층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분배 정의의 실현, 평등과 평화, 생태환경의 보호를 실천하는 진보는 앞날을 바라보며 뒷자리에서 묵묵히 성찰하고 헌신한다. 앞자리를 빼앗아 기득권을 차지하려는 탐욕은 진보의 가치가 아니다.
진보를 내세우면서 진보의 이름을 모독하는 세력이 있다. 수구적인 민족주의 이념 아래 ‘우리민족끼리’를 외치거나 핵무기를 거머쥔 세습독재를 옹호하는 것은 진보의 길을 거꾸로 가는 헛걸음이다. 진보는커녕 유례없이 시대착오적인 퇴보요, 일그러진 민족지상주의일 뿐이다. 진보의 이름이 바르지 않은 것이다.
보수는 극우파가 망치고 진보는 극좌파 때문에 망한다. 보수는 낮은 자리를 돌보고, 진보는 뒷자리를 보살펴야 한다. 희망 잃은 짝퉁 보수, 성찰 없는 가짜 진보는 그 허망한 거짓 이름을 버리고 실체를 드러내든가, 아니면 권력욕의 미망(迷妄)에서 돌이켜 바른 이름을 찾아야 한다. 언제까지 거짓 이름으로 역사와 국민을 속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