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황혼의 이념
이 우 근
변호사 / 숙명여대 석좌교수
시작이 반이면, 끝도 반인가? 아니다. 끝은 전부다. 시작에서 중간을 거쳐 끝에 이르러야 비로소 전체가 드러난다. 아침에는 그날 하루의 삶이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지 아직 희미하다. 한낮에는 사무와 활동으로 분주하다. 해가 지는 저녁이 되어서야 하루의 삶 전체를 돌아보게 된다. ‘진리는 전체다’라고 정의한 헤겔이 <법철학> 서문에 썼듯이,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야 날개를 편다.
하루의 삶 전체가 황혼녘에 드러나듯, 한 해의 삶도 그해 세밑에 전체가 드러난다. 세밑이 되면 우리는 한 해 동안 달려온 삶의 발자취를 돌아보며 깊은 후회와 탄식에 빠져든다. 그 후회와 탄식이 없다면, 새해의 다짐도 각오도 무용지물이다. 후회와 탄식을 반성과 참회로 부정하고, 그 반성과 참회를 또다시 부정하는 새로운 긍정의 다짐이 변증법적 발전의 지양(止揚)이라면, 세밑의 성찰이야말로 새해 새로운 삶을 예비하는 튼실한 밑거름이 될 터이다.
세밑의 성탄절은 나름대로 뜻이 깊다. 갓난아기 메시아를 받은 것은 나무 말구유였다. 목수 일로 나무를 다루던 그는 나무 가시관을 쓰고 나무 십자가에 못 박혔다. 말구유는 십자가로 향하는 출발점이었다. 황혼녘에 이른 십자가의 죽음에서 메시아의 삶 전체가 드러난다. 성탄절의 말구유는 그 십자가를 미리 보여준다. 말구유에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에서 말구유를 돌아본다. 탄생의 아침과 죽음의 저녁이 한 해의 세밑 크리스마스에서 하나로 만난다.
크리스마스는 수도 예루살렘의 왕궁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시골 마을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시작되었다. 그곳 말구유에서 메시아가 첫 숨을 내쉰 것은 스스로를 낮추는 자기 비움(케노시스)의 시작이다. 말구유의 케노시스는 십자가에서 완성된다. 그것이 세밑에 찾아오는 크리스마스의 성찰이다. 이 성탄절에 우리는 무엇을 후회하며 비워내는가? 올 세밑에 우리는 또 무엇을 반성하며 다짐하는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올해는 참혹한 전쟁의 한 해가 되었다. 여러 나라가 직접 참전하지는 않았지만, 무기와 병참 지원으로 세계전쟁의 모습을 띠어간다. 절대 권력자의 3연임이 시작된 중국은 온 국민이 전체주의 체제의 감시대상으로 전락했고, 억압‧검열‧체포가 일상화되어 있다. 핵폭탄은 물론 대륙간 탄도미사일과 중‧단거리 미사일 개발에 성공한 북한은 서울을 핵 공격의 과녁으로 확정하고, 선제타격을 아예 법으로 명문화하기에 이르렀다.
이태원 축제 거리의 참사로 슬픔의 땅이 된 한국은 정치권의 끝 모르는 싸움으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다. 나라도, 세계도 온통 싸움판이다. 이 상태로는 희망의 새해를 기대할 수 없다. 처절한 반성, 치열한 다짐이 뒤따라야 한다. 그것이 황혼녘에 날개를 펴는 올빼미의 지혜다. 말구유를 기억하는 십자가의 눈길, 한 해의 삶을 돌아보며 허망한 욕망의 찌꺼기들을 말끔히 비우는 세밑의 그윽한 성찰이다.
이성과 논리는 아침의 이념, 감성과 열정은 한낮의 이념일 뿐…. 이성이나 감성은 저녁의 이념이 되지 못한다. 황혼녘의 이념은 영성(靈性)이다. 정의와 평화를 둘러싼 공리공론들이 이 나라를 얼마나 큰 혼란으로 이끌었던가? 촛불과 광장의 감성들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심각한 갈등으로 몰아넣었던가? 날카로운 분별의 이성은 오만으로 흐르고 뜨거운 열정의 감성은 독선으로 치달리지만, 고요와 온화함을 간직한 영성은 겸손으로 녹아든다. “이성이 인간의 삶을 지배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삶의 가능성은 소멸하고 말 것이다.”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에 쓴 말이다. 인생의 황혼기에 이른 그는 이성과 감성을 훌쩍 넘어 신앙의 영성 안에 깊숙이 잠겼다.
“이어진 두 연못 중 한 곳에 물이 들어오면, 두 연못 모두 평평해진다.” <주역>에 있는 이택(麗澤)의 교훈이다. 이성으로 분별하고 감성으로 갈라서는 상쟁이 아니라, 더불어 화합하고 영성으로 어울리는 상생의 가르침이다. 메시아는 십자가에서 흉악한 사형수를 말구유처럼 품어 안았다. 그 따뜻한 포용이 성탄절의 명상, 세밑의 성찰이 되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