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그 땅의 사람들
대니얼 김
제너럴 컨트랙터
‘설광봉도’는 충청남도 아산, 천안, 예산, 공주지역에 있는 네 개의 산을 연결해 조성한 총거리 25마일의 걷기 여행코스다. 설화산, 광덕산, 봉수산, 도고산의 앞 글자를 따서 ‘설광봉도’라 이름 붙여졌다. 그중 일부 구간인 도고산을 다녀왔다.
새벽 6시50분 수원에서 탑승한 기차는 온양을 지나 대천, 장항, 익산까지 달리는 무궁화 열차다. 산행은
도고온천역 하차 후 1마일 떨어진 도고중학교에서부터 시작된다. 도고산(해발 482미터)은 동서로 뻗은
연봉이다. 위에서 언급한 ‘설광봉도’의 일부 구간으로 서해안의 초계와 방어를 위한 군사적 요새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주봉인 국사봉에는 봉수대가 있었으며 서기1390년(고려 공양왕 2년) 6월에는 서해안에 침입한 왜구가 이
곳에 진을 치고 약탈을 자행하자 고려 장수 유사덕과 유용생이 이끈 관군에 의해 수백 명을 섬멸했다는 내용도 안내판에 적혀있다.
정상을 거쳐 새터고개-운주사-도고온천장까지 총 도보거리는 10마일쯤 됐다. 도고산 하산길은 굴참나무에서 떨어져 쌓인 낙엽들이 산길을 덮어 매우 미끄러웠다. 마치 ‘낙엽스키장’에서 하강이라도 한 듯한 느낌이다. 얼마 전부터 출근을 시작한 현장은 충남 아산지역에 있다. 현지 주민을 위한 커뮤니티 스포츠 복합시설 현장이다. 서울과 달리 다소 한적하고, 시가지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전답(田畓)이 넓게 펼쳐져 있는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다.
요새 들어 그 곳 동네를 지날 때면 김장 담그느라 분주한 동네사람들을 볼 수 있다. 한 쪽에서는 조금 전
밭에서 뽑아논 듯한 흙 묻은 배추를 다듬기도 하고, 몇 집 건너 마당에서는 소금에 절인 배추를 헹궈내는 손길들이 바쁘다. 옆에 들어선 비닐하우스 안에서는 가족, 이웃들이 모여 배추 속 넣기에 여념이 없다.
엔데믹 이후, 아직도 국내외가 어수선 한 탓인지 요즘은 국내여행이 대세다. 도서관이나 서점에도 해외여행보다는 국내여행 관련 도서들이 더 많이 눈에 띈다. 아직은 해외항공편을 비롯하여 멀리 나가기에는 고려할 사항이 많아서 일 게다. 필자의 경우도 기왕, 한동안 아산 쪽에서 근무할 바에야 주말을 이용하여 이 곳 충청남도 인근지역을 둘러보리라는 계획을 세웠다. 늘 하던대로 산행을 겸하여 단순히 경관, 볼거리, 먹을거리 등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이 땅의 사람들 삶의 궤적을 되돌아보는 일종의 답사형식의 여정을 꾸려 볼 참이다.
이번 산행코스도 그 중 하나였다. 첫 여정에 오르기 전, 이 지역 답사기행과 관련된 글을 찿아 읽었다. 옮겨본다. "차령산맥이 충남 서해바다에 이르러서는 그 맥을 주춤거리다가 방향을 아래쪽으로 틀면서 마지막으로 치솟은 산이 가야산(678미터)이다. 가야산을 둘러싼 예산, 서산, 홍성, 태안, 나아가 당진, 아산 등 넓은 들판들을 내포(內浦), 또는 내포평야라고 부른다. 그래서 이 고장 사람들은 행정구역이 달라도 마치 옆 마을 사람처럼 느끼는 친근한 풍습을 갖고 있으니 내포사람들이라 불러도 무방할 성 싶다. 평온 속에 살아온 사람들의 정서와 마음씨는 굳이 따지지 않아도 알 만한 일이다. 부드럽고 여유있고, 친근하고…, 그러나 무슨 연유에서 일까. 내포땅에서 배출한 인재들은 온화한 성품의 보유자가 아니라 기품이 강해서 시쳇말로 ‘깡’이 쎈 사람들이다. 최 영 장군부터 시작해서 사육신의 성삼문, 이순신 장군, 추사 김정희, 자결한 구한말 의병장 최익현, 김대건 신부, 매헌 윤봉길, 김좌진 장군, 개화당의 김옥균, 만해 한용운, 화가 이응로 등 모두 쉽지 않은 분들이고 제명을 못다 할 망정 큰 일들을 하신 분들이 이 곳에서 배출된 인물들이다. 답사를 다니는 일은 길을 떠나 내력있는 곳을 찿아가는 길이다. 찿아가서 인간이 살았던 삶과 흔적을 더듬으며 그 옛날의 영광과 상처를 되새기면서 이웃을 생각하고 그 땅에 대한 사랑과 미움을 확인하는 일이다. 그런 답사를 올바로 가치있게 하자면 그 땅의 성격, 즉 자연지리를 알아야 하고, 그 땅의 역사, 즉 역사지리를 알아야하고, 그 땅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삶의 내용, 즉 인문지리를 알아야 한다. 답사는 문화지리라는 성격을 갖는다.”(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유홍준, 2011).
산행 후 흘린 땀을 씻으러 도착한 도고온천장 마을 앞, 길에서 마주친 현지인에게 물었다. "이 근처 주민들이 자주 가는 수질좋은 온천은 어딘가요?” 그랬더니 “주욱 가서 오른편에 있는 ‘박대통령 별장온천’이라는 곳에 많이들 갑니다”라고 대답한다. 알려준 이름과 동일한 간판의 온천업소 로비에 들어서니 1968년 박 대통령이 재임시 휴식차 자주 묶었던 별장위치라고 내력이 적혀있다. 그래서일까, 이번 여정(旅程)도 유홍준 선생의 글처럼, 답사여행이란 한 인물의 영광과 상처를 되새길 수 있는 인문지리학적 체험의 작은 사례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