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률 칼럼] 국산 자동차에 대한 옛 추억
90년대 말 여름 미국에서 겪은 일이다. 당시 나는 이른바 “끗발있다”는 직장을 그만두고 30대 후반의 나이로 학위공부를 시작한 늦깎이 유학생이었다. 박사과정 첫 학기를 정신없이 보낸 나는 긴 여름방학을 맞아 가족들과 서부로 여행 중이었다. 옐로우스톤을 뒤로 하고 콜로라도 로키마운틴의 파익스피크(1만4000피트) 고갯길을 넘어갈 때다. 갑자기 내리막길에서 자동차 브레이크가 듣지 않았다. 안심하고 탈 수 있다고 해서 구입한 토요타 캠리였는데….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아내와 두 아이가 눈치채지 않게 엔진 브레이크를 이용해 설설 기었다. 백두산 높이 두 배 정도의 고갯길이다. 중간지대 휴게소까지 내려오는 데에만 족히 한 시간 이상 걸렸다. 구사일생…, 식은 땀으로 온몸이 흠뻑 젖었다.
휴게소에 가까스로 도착한 나는 곧바로 트리플 에이(AAA)에다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거대한 견인차를 끌고 온 자동차 정비사는 이곳저곳을 체크해 보더니 한 시간 정도 쉬었다 가면 그 뿐이라고 진단했다. 불안해 하는 나에게 그는 ‘베이퍼 록’이라는 현상으로 긴 내리막길에 브레이크 패드가 과열돼 발생하는 일시적인 것으로 식혔다 가면 된다고 말한 뒤 떠나려 했다.
지나치게 간단한 현상으로 돌리는 그에게 놀란 쪽은 오히려 나였다. 보름간 서부여행 일정을 핑계로 재차 정밀 체크를 해줄 것을 부탁하자 그는 단 한마디로 나를 벌겋게 만들었다. “당신 한국인이냐. 현대차는 어떤지 모르지만 토요타는 세계 최고차라 문제없다”고 잘라 말했다. “재팬 이즈 넘버 원” 이라며 엄지 손가락을 쑥 내보인 뒤 떠났다. 순간적으로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얼마나 잘 만들었길래 이 깊은 로키산속의 정비사조차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고 “재팬 이즈 넘버 원”을 주장하고 나설까.
2000년대 초 미국대학에서 강의 중이었다. 무슨 얘기 끝에 현대차가 등장하자 수강생들 중 누군가가 “정크”라고 한마디했고 모두들 크게 웃었다. 일부 수강생은 엄지 손가락을 바닥으로 내리는 시늉을 하며 현대차를 비하했다. 사실 그때는 모두가 국산차를 우습게 봤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도 칠년간의 유학시절 토요타 캠리를 타고 다녔다. 부끄럽다는 것은 멀쩡한 한국차도 있는데 하필이면 일제차를 타고 다님에서 비롯된 자괴의 마음이다. 그러나 당시 유학생이나 주재원들은 고장이 잦고 리세일 밸류가 낮은 미제차, 국산차는 멀리했다. 대부분 캠리나 어코드 등 일제차를 선호했다. 심지어 세금으로 유학이나 연수온 공무원들조차도 일제차를 타고 다녔다. 당시만 해도 국산차는 고장이 잦고 연수가 끝나거나 근무연한이 끝난 뒤 되팔고 돌아가야 하는 특수한 사정 때문에, 되팔 때의 가격을 고려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런 사정을 아는 한국정부도 애써 모른 체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국산차 위상이 확 달라졌다.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유럽의 경우 일제차와 비슷하게 팔리고 있다. 자동차의 고향격인 독일에서는 수입차 중에서는 단연 현대차가 1위다. 자동차 왕국 미국시장에서도 소비자들이 뽑은 `가장 이상적인 자동차 브랜드`에 뽑히기도 했다. 북미시장 점유율도 10%대에 올랐다. 10대 중 1대는 현대차라는 얘기다. 국내 소비자들의 반응은 더욱 인상적이다. 최근 한 조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현대차의 품질, 디자인에 대해 절대적으로 긍정적이다. 실제로 거리에서 현대차를 보면 날렵하고 세련미의 극치다. 잔고장이 없고 AS가 좋다. 그래서 한국사람들은 이제 벤츠가 아닐 바엔 현대차 탄다고들 한다.
신혼시절 처음 구입했던 고장투성이 엑셀에서 지금의 제네시스까지 타본 나로서는 국산차의 성능을 온 몸으로 알 수 있다. 세계를 휩쓸고 있는 한류는 물론이고 삼성, LG의 전자제품과 함께 드디어 자동차도 이제 세계 톱클래스에 올랐다는 느낌이다. 언젠가 다시 미국에 머무를 기회가 있으면 나는 현대차를 타고 콜로라도 로키마운틴을 다시 넘어보고 싶다. 그래서 한순간 나의 얼굴을 벌겋게 만들었던 그 옛날의 정비사를 만나 한국 자동차가 이만큼 발전했노라고 말하고 싶다.
김동률 칼럼니스트: 서강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려대를 졸업했다. 사우스캐롤라이 매체경영학 박사를 했다. KDI 연구위원, 영화진흥위원, EBS 이사, 공기업 경영평가위원 등을 역임했다. 한국의 주요 일간지에 기명칼럼을 연재했으며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유려한 문장과 설득력 있는 글로 사랑을 받아 왔다. 그의 에세이는 한국의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게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