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전주에서 만난 나한(羅漢)
김희식
(주) 건축사무소 광장 상무
그간 주말이면 열차여행을 꽤나 다녔습니다. 경부·호남선 노선은 물론이고 영·호남과 중·서부를 잇는 환승열차 노선도 몇 군데 돌아봤습니다. 용산-예산-대천-익산을 잇는 장항선, 서해 금빛열차, 조치원-청주-제천을 달리는 충북선, 김천-상주-예천-영주를 운행하는 경북선 등도 최근에 다녀온 코스들 입니다. 때로는 특별한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주욱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규칙적으로 덜컹대며 달리는 철마(鐵馬)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무심하게 스쳐가는 차창 밖을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서울에서 땅 끝까지 초고속열차인 KTX나 SRT로 갈 경우, 두세 시간 남짓 걸리는 국토인데다가 이제는 새마을, 무궁화號인 비고속철도의 경우도 길어야 서너 시간이면 전국을 오갈 수 있는 철길이 되어버렸습니다. 휘-익 지나가는 쾌속철도보다는 다소 늦더라도 새마을이나 무궁화號를 더 선호하게 되더군요. 바깥 풍광을 좀 더 찬찬히 볼 수도 있고, 갈 길 바쁜 초고속열차 승객보다는 낯설지만 말 걸기가 수월한 객차 내 승객들과 그 고장에 관한 한담(閑談) 나누는 재미도 쏠쏠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현지 인근에 산재한 국립박물관이나 미술관들도 자주 둘러 보는 편입니다.
지난 주에는 논산-강경을 거쳐 전주국립박물관엘 다녀왔습니다. '깨달은 수행자, 나한(羅漢)’이라는 기획전시가 열린 전주를 찿던 날, 100여 점에 이르는 나한의 얼굴들이 박물관 로비에서 필자를 기다리 듯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한의 의미를 찿아보니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수행을 통해 최고의 경지에 이른 부처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한자로 풀어보는 우리문화유산, 손병렬, 2007).
박물관 내 전시내용을 살펴봅니다. 이번 전시는 강원도와 전라도의 절터 등에서 찿아 낸 나한들을 모아 놓았더군요. 강원도 영월, 창령사터에서 2001년 발견된 오백나한에서는 ‘창령(蒼嶺)'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왓장과 함께 출토되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정형화 되지 않은 해탈한 나한의 표정들이 고려시대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994년에 발견된 전라도 나주 불회사의 나한상 얼굴 조각상들은 눈을 감거나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들이 많았습니다.(15세기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 남원 실상사 서진암 나한상도 화강석으로 조각되었습니다.
정복을 착용하고 단정하게 손을 모으로 정좌하고 있는 모습들이 인상적입니다. 담양 지역 서봉사 터 나한상들은 청년부터 노년의 승려 모습으로 되어 있습니다. 각 지역별 나한들의 공통점은 석재라는 질박한 소재를 통하여 살아있는 듯한 얼굴로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희로애락의 마음 상태에서 온전한 깨달음으로 변모하는 과정의 나한들의 얼굴을 보면서 ‘비움’이라는 화두가 떠 올랐습니다. 최근들어 ‘비움과 채움의 원리’를 다룬 책을 읽었습니다, '비움’을 통한 간헐적 몰입을 시도한다면 몸과 마음이 아주 편안한 상태에서 내면에 숨은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다는 요지의 책입니다.
글 중 일부를 옮겨봅니다. "Less is More, 직역하면 '적을수록 좋다. 비울수록 채워진다' 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란 생의 가치관이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미니멀리즘은 본래 단순하고 간결한 것에서 오는 미학을 기초로 한 문화사조이지만, 현재는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고 최소한의 소유와 소비로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찿는 일종의 삶의 가치관으로까지 의미가 확장되어 사용되고 있다. ‘단샤리’라는 미니멀리즘도 있다. 10여 년 전부터 일본의 야마시타 히데코는 ‘단샤리’를 주창했다. 끊을 단(斷), 버릴 사(捨), 떠날 리(離)를 뜻하는 단어로 불필요한 물건들을 과감히 끊고 버림으로써 집착에서 벗어나 그런 일들에 낭비되던 에너지를 자신의 삶에 집중하자는 얘기다. 부족함이 없는 이 시대에 무언가를 비워내는 일은 언뜻 불필요한 듯 들리지만 너무나 필요한 일이다. 먼저 몸과 마음에서 불필요한 생각과 스트레스 등을 비워냄으로써 순탄하게 간헐적 몰입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 휴식과 비움의 순간이야말로 간헐적 몰입의 문을 열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간헐적 몰입, 조우석著, 2022).
박물관을 나서면서, 500~600년 전, 나한들이 짓고 있던 미소들이 바로 비움의 좋은 단서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인가, 이번 여행도 무용한 일이 아닌 ‘간할적 몰입의 순간’을 위함이리라는 생각도 듭니다. 여하튼 ‘대한민국, 열차로 돌아보기 프로젝트’는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