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칼럼] 시든 야채 고르시는 엄마
오래 전 한국에 살 때 일이다. 어느 날 수퍼마켓에서 야채를 고르는데 엄마 친구도 장을 보러 오셨다. 내 옆으로 오더니 “너희 엄마는 리어카에 야채 떼어다 파는 아저씨 기다렸다가 시든 야채만 골라서 산단다.” 나는 순간 ‘이게 무슨 소리지? 돈을 아끼려 그러셨냐?’ 생각하고 부끄러웠다. 그 아주머니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희 엄마는 하루 종일 돈 몇 푼 벌자고 리어카 끌고 다니며 장사하다 해지면 집에 가야하는데 시든 야채를 남겨서 가는 심정이 어떻겠냐? 고, 제값 주고 일부러 시든 것을 모두 팔아주곤 하신다”고 하셨다. 평생 가난하게 살아오신 엄마가? 뒤통수 한대 세게 맞은 느낌이었다.
얼마 전 LA 코리아타운 노인아파트에 계시는 엄마에게 다녀왔다. 어머니를 뵙고 나오는데 시장 가방에 챙겨 놓으신 것들을 건네주신다. “뭐예요?” “어, 과일, 아침에 길 건너 바람 쐬러 나갔다가 조금 샀어.” 엄마에게 갈 때마다 떠나기 전 필요한 게 없느냐고 여쭤보면 항상 먹을 게 많이 있다고 아무 것도 사오지 말라고 하신다. 엄마는 대형 마켓을 가시지 않는다. 새벽이면 노인아파트에서 행상하는 남미 상인의 야채를 팔아주려 하신다. “저 사람들도 딱한 사정이 있을 거야” 시장 가방을 열어보니 블루베리, 딸기, 바나나가 있었다. 젊어서 혼자되어 시어머니와 우리 자매를 돌보느라 한때 거리 장사도 하셨던 엄마는 행상을 하는 분들을 보며 동병상련(同病相憐)을 느끼시는 듯하다.
몇 해 전, 모 대학병원 사후 신체 기증 신청서를 갖고 오셨다. 기증자와 기증자의 보호자 사인(sign)이 필요하다고 내게 사인을 하라고 하신다. 젊은 시절 살기 바빠서 사회에 좋은 일이라곤 못했는데 이일이라도 하시겠다며, 어차피 죽으면 영혼은 천국에 갈 것이고, 썩어 한 줌 흙으로 될 몸 조금이라도 좋은 일이 된다면 기쁘다고 하신다. 정말 그렇게 엄마를 보내드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좀 더 생각해 보자고 했지만 굳이 그렇게 하시겠다고 고집하셨다. 사인 후 병원에서 날아온 파란 기증자 카드, 신분증과 함께 자랑스럽게 지니고 계신다. 아직도 잘한 일인지 나로서는 혼돈스럽다.
엄마의 딸이지만 엄마를 따르기가 어렵다. 마켓에 가면 나도 모르게 싱싱하고 좋은 것 고른다. 가게에서 과일을 고를 때는 일부러 행상하는 분을 찾아 과일을 사시고, 행상하는 야채 리어카에서 시든 야채를 고르시는 엄마는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래도 한 가지는 실천했다. DMV 신분증에 신체 기증 등록은 해 두었다. 그때는 아무 생각없이 했는데 엄마 흉내를 낸 것 같아서 잘 했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일상 가운데 이웃을 배려하고 나누는 삶을 실천하는 엄마가 자랑스럽다. 젊은 날을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엄마, 배운 것도 없고, 경제적인 여유도 없어 늘 고단한 삶을 살았을 텐데도 엄마의 마음은 엄마의 백발처럼 눈부시다. “감사하다”를 입에 달고 사는 입가의 주름은 꽃처럼 아름답다. 이웃에 대한 작은 배려가 엄마를 행복하게 해 주는가 보다. 누군들 어머니를 존경하지 않겠냐만 난 엄마가 참 존경스럽다.
UN 사무총장의 특별고문인 제프리 삭스(Jeffery Sachs)는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더 건강하고, 오래 산다’고 했다. 일상에서 행복을 찾으시는 엄마가 제프리 삭스의 말처럼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엄마의 행복을 보면서 “주는 자가 복되다”라는 성경 말씀을 생각한다. 나도 엄마의 행복을 배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