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영수의 코미디 40년 연예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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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영수의 코미디 40년 연예비사<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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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미 별이 되다


1.

故 현미 선생님 (사)대한가수협회장 영결식 2023.4.11. 09시 중앙대학병원 

사회: 이용식, 조사: 가수협회장 이자연, 추도사: 박상민, 알리 

조가: 떠날 때는 말 없이 

장례위원장: 서수남 

헌화: 윤항기, 남일해, 주혜란, 정훈희, 임희숙, 노사연, 이무송, 문희옥, 남궁옥분, 가족친지….

장례식은 여기까지다. 다른 것은 없다. 무엇인가 더 있다고 우기고 싶은데 꺼리가 아무 것도 없다. 현미 누님께 정말 죄송스럽다. 현미 누님 가는 곳에 늘 따라다니던 음악도 노래도 없다. 방송 관계자도 정치인도 경제인도 팬들도 약속이나 한 듯 없다. 

그 많은 가수는 다 어디로 갔나. 미스트롯, 미스터트롯 쪽으로 가요계 인파가 다 몰려갔나? 천둥번개 폭풍우가 갑자기 들이닥치며 하늘이 울었다. 동해안 강릉 쪽 축구장 240개 면적이 순식간에 불탔고 회복하는데 100년이 걸린다. 4월은 잔인한 달. 사람이 없어 날씨 얘기라도 해본다.


2.

애잔한 음악이 흐르고 현미 누님 남기고 간 히트송을 경건한 마음으로 다같이 부르면서 떠나는 님을 기리고 아쉬워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눈물 속에 큰누님의 정과 사랑을 느끼며 아름답고 거룩한 이별을 하고 싶다.

싸이, BTS(방탄소년단)가 나오고 빌보드차트 1, 2위를 석권하고 아카데미상을 받고 K팝, K드라마, K무비가 있는 나라의 문화예술인에 대한 예우가 아쉽다.

1962년 밤안개와 함께 왔다가 1964년 떠날 때는 말없이 처럼 지금 막 떠나가 버렸다. 혹시라도 부담이 될까 누가 알세라 조심스럽게 갔다.

한류가 과연 이어나갈 저력이 있는가 떠나간 현미 누님은 걱정이 없다. 우리가 문제다. 누님께서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것을 아는가.


3.

박성서 가요평론가의 현미 회고를 분석해 본다. 평양 경림초등학교시절 걸스카웃 단장이 되어 어린이 대표로 김일성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헌화를 했으나, 자유를 찾아 가족과 이별을 하고 남한에 왔다는 것은 특이하다. 대구 피난처에서 연합중학생으로 김백봉무용단에 들어갔고 꽃초롱오페라(북한출신예술단체, MC곽규석, 성우: 구민) 단원이 되어 생계를 위해서 14세 때 소녀가장으로 출연했다.

대전종합학교를 거쳐 덕성여대 가정학과를 다녔으나 1955년 미8군 무대에 서기 위해 중퇴했다. 40년 후 2004년 덕성여대는 명예학사 졸업장을 수여했다. 전시 어려운 상황에서도 학업을 계속 이어갔고 어린시절부터 기예를 꾸준히 연마했기에 당연한 결과이며 드디어 한국의 영원한 디바 대스타가 되었다. 스토리는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이 내용만 갖고도 수많은 조문객이 왔어야 하지 않을까. 너무나 배울게 많은 누님 이었다.


4.

독특한 창법, 큰 웃음 볼륨있는 목소리로 악보를 자유자재로 컨트롤 하기 때문에 악보대로를 고집하던 작곡가 이봉조 선생은 녹음 직전에 악보를 건네  현미 누님의 에드립을 제한했다. 그것 때문에 항상 격렬하게 다투었다고 한다. 예술에 대한 주관은 이렇게 철저했다.

서수남, 이용식, 엄영수 세 사람이 오래 전부터 진작 만나고 싶었다. 뚱뚱이와 홀쭉이, 꺽다리와 장다리, 땅꼬마와 몸짱, 그림이 재미있다. 어떤 작품을 해도 힛트할 것 같다.

현미 누님 덕분에 이렇게 다정하게 자리할 수 있었다. 끝까지 고마운 큰누님께 감사드린다. 무거운 짐 다 내려놓으시고 천국에서 영원히 편히 쉬십시오.

현미 누님은 “명숙이 요새 연락이 안된다” “오래 살아야 하는데 몸이 많이 않좋은 가봐….” 근심 걱정이 대단했는데 오히려 건강했던 현미 누님이 먼저 가실 줄이야 상상 못했다.

가요무대에서 한명숙 누님의 노란 사쓰의 사나이를 현미 누님이 파워풀한 음성으로 볼륨있는 꺾기로 신나게 불러 기립박수를 받고 크게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가수는 히트송이 생명이고 자식을 낳은 것 이상으로 아낀다. 한명숙 누님은 자식을 뺏긴 것 같아 밤새도록 한없이 울었다. 시샘이 아니고 자신의 히트송에 대한 사랑이었으리라.


5.

밤 늦게 마지막 조문은 농촌의료봉사를 위해 양구보건소장으로 있는 주혜란 박사와 일본에서 급히 귀국한 김수희 가수였다.

분위기 메이커로 팝송을 자주 부르는 주혜란 박사. 양구축제 때 언니와 같이 떠날 때는 말 없이를 한 소절씩 부르기로 해서 열심히 연습했다며 텅빈 빈소에서 영정의 현미 누님을 보며 핸드폰을 이용해 반주를 틀고 간주에 언니 잘 가! 언니 또 만나! 언니 행복해야 돼!를 몇 번씩 반복했다. 

현미 누님 디너쇼 사회를 여러 번 맡았었다. 큰 영광이었다. 2008년 롯데호텔 디너쇼 12월 22일 전날인 21일에 큰아들이 미국에서 총기습격을 받아 위태로웠다. 이 사실을 숨기고 공연을 다 마치고 말없이

미국으로 떠났다. 관객과 이웃에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는 배려였다. 다행히 아들은 완치됐다. MC인 나도 나중에야 알았다.


6.

일화는 많다. 공연 후에 식당에 들리면 시골의 작은 식당은 갑자기 커진다. 누님께서 말을 하면 시끌벅쩍 장이 서고 바로 화개장터가 된다. 온 동네 사람이 다 모인다. 

식당 주인은 너무 기분이 좋다. 평범했던 집이 유명한 맛집으로 탄생한다. 들리곳마다 명소로 만드는 기술이 있다. 이 김치 너무 맛있으니까 이 반찬 내 입맛에 꼭 맞으니까 남은 거 버리면 아까우니 남은 것만 싸달라고 한다. 주인 입장에서 맛있다 하니 김치통을 꺼내 포장을 할려고 하면 극구 말린다.

손해 나게 하면 안된다고 시골인심이 어디 그런가. 크게 포장해서 싸주면 절을 몇 번씩하고 오늘 큰 신세졌다고 잘 먹겠다고 하며 손도 크다. 반드시 큰 금액을 아무도 모르게 주방에 쥐어주고 거절할 틈도 없이 뛰어나간다.

톱스타였지만 접근하기 쉽고 서민 대중과 잘 어울렸다. 모창 가수를 가엾게 여겨 인사도 잘 받아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출연료에 관계없이 응해주었고 무대가 있건 없건 노천이건 해변이건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누굴 만나도 숨김 없이 하고 싶은 말을 다해주고 듣고 싶은 말 다들어 주었다.


7.

가요계 대모 현미 누님은 험난한 인생의 굴곡을 이겨낸 거목. 사랑과 미움의 기나긴 갈등을 참고 견디어 온 바위라 생각한다.

어려운 시절 꿈과 위로를 주었고 서민 대중을 웃고 울렸던 민족가수 삶의 애환과 톱스타의 화려한 무대매너를 있는 것은 있는대로 없는 것은 없는대로 속시원히 털어놓은 국민영웅, 다시 올수 없는 길을 떠나간다.

“현미가 백미보다 영양 많고 건강에 좋고 면역력을 기르고 식량을 아끼고 밥맛도 좋다.”

무대에서 현미 예찬론을 펼쳤던 큰누님은 정말 현미 같은 그런 분이었다. 그리고 떠날 때는 말없이 밤안개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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