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정오의 햇살
이 우 근
변호사 / 숙명여대 석좌교수
“태양 때문이었다.” 살인의 동기를 추궁하는 법정에서 뫼르소가 불쑥 내뱉은 말이다. 카뮈의 <이방인>에서 태양은 뫼르소의 길을 가로막는 관습‧전통‧법률 따위의 장애물로 나타난다. 뫼르소(Meursault)라는 이름 자체가 살인(meurtre)과 태양(soleil)의 합성어처럼 느껴지듯, 그의 살인은 한낮의 태양과 떼려야 뗄 수 없이 엮여있다. 그는 칼을 든 아랍인을 향해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 것이 아니었다. 햇살에 번쩍이는 칼날을, 자기 존재를 위협하는 장애물을 향해 무심결에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태양은 그러나 카뮈에게 더 깊은 의미로 다가온다, 그는 스탈린을 옹호하는 사르트르를 ‘심야의 사상’으로, 스탈린을 비판하는 자신을 ‘정오의 사상’으로 대비했다. “햇살이 직각으로 내리쬐는 한낮의 투명함으로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무제한의 권력에 반항하는 인간은 무제한의 자유에도 반항한다. 반항이 순수성을 잃고 폭력이나 살인을 찬양하는 순간, 반항은 그 정신을 배반한다. “스스로 심오한 리듬을 찾아가는 반항은 광란의 진폭으로 불규칙하게 흔들리는 추와 같지만, 이 불규칙한 상태가 절도를 벗어나는 일은 없다.” 정오는 절도 있는 반항의 시간, 새벽과 심야의 균형추였다.
이성과 절대지(絕對知)의 철학자 헤겔은 ‘미네르바의 올빼미’를 저녁 하늘에 날렸고, 혁명의 사상가 마르크스는 ‘갈리아의 수탉’으로 새벽을 일깨웠다. 갈리아는 시민혁명이 성공한 프랑스의 옛 이름이고, 수탉은 프랑스의 상징동물이다.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키려던 마르크스는 수탉의 새벽 울음이 세상을 깨우듯 철학도 현실 세계를 이끌어야 한다고 믿었다.
카뮈가 정오의 햇살을 찬양했다면, 니체는 정오의 그림자에 주목했다. 정오는 인간과 사물의 그림자가 가장 짧아지는 순간이다. 니체는 혁명의 새벽이나 이성의 저녁이 아니라 초인이 탄생하는 정오의 시간을 사랑했다. 성서는 공의(公義)를 정오의 빛에 비유한다. “주께서 너의 공의를 정오의 햇살처럼 빛나게 하시리라.”
정치철학자 마르크스가 새벽의 수탉을, <법철학>을 쓴 헤겔이 황혼의 올빼미를 사랑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정치는 새벽처럼 현실을 앞에서 이끌고, 법치는 저녁처럼 현실을 뒤에서 성찰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혁명을 바라는 것도, 이성의 절대지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햇살이 직각으로 내리쬐는 정오의 투명함으로 현실과 냉정하게 마주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혁명의 새벽과 성찰의 저녁 사이에서 균형추 역할을 하는 정오의 인식이 아쉽다. 혁명의 수탉도, 이성의 올빼미도 정오의 태양을 가릴 수 없다. 정오는 시계추처럼 정치와 법치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중용의 시간이다. 정치의 문제는 정치권에, 사법의 문제는 사법부에 맡겨야한다. 강제징용 피해자의 일본기업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인정한 판결로 국내외에 큰 정치적 파문이 일어나자, 주심대법관은 ‘건국하는 심정으로 쓴 판결’이라고 주장했다. 건국은 새벽 수탉의 사명이지 저녁 올빼미의 몫이 아니다. 새벽에 날갯짓을 하는 올빼미도, 저녁에 우는 수탉도 모두 자연을 거스르는 괴이쩍은 변고일 뿐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새벽과 황혼을 분간하지 못하는 극심한 혼돈에 빠져있다. 정치권에서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할 사안은 고소·고발로 사법의 영역에 떠넘기고, 사법적으로 판단해야 할 사안은 거꾸로 정치권에서 제멋대로 주무른다. 정책판단의 당부를 법정에 묻는가 하면, 법정 앞에서는 시위꾼들이 범죄혐의자의 무죄를 목청껏 외쳐댄다.
‘허위사실을 말했어도 적극적·일방적인 공표 의도가 없다면 무죄’라는 취지의 대법원판결이나 ‘출국금지조치가 위법하더라도 재수사의 목적이 정당하다면 무죄’라고 판단한 하급심판결에서는 엄정한 법리가 아니라 짙은 정치색이 묻어난다. 저녁의 성찰에 충실해야 할 법률가들이 새벽의 첫걸음을 이끄는 정치‧행정의 요직에 무리지어 들어앉는 모습도 적잖이 곤혹스럽다. 정치의 사법화, 사법의 정치화… 그 괴이한 그림자가 정오의 햇살 아래 말끔히 사라지기를 고대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