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 선박의 평형수(Ballast Water) 이야기
이보영
한진해운 전 미주지역본부장
부두에 정박한 대형선박들이 옆구리로 물을 쏟아내는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배의 사이즈가 클수록 오랫동안 물을 쏟아내는데 과연 이 물의 용도는 무엇이며, 왜 쏟아내는 것일까?
수 년 전부터 한국사회를 뒤흔들었던 사건, 아직도 그 상흔이 가시지 않고 있는 사건은 ‘세월호 침몰사고’다. 좌초설, 폭침설, 고장설, 음모론 등 괴담과 억측으로 많은 재정과 시간을 낭비했고 정치적, 사회적으로 혼란만 가중시킨 해상사고였다. ‘선박의 평형수(平衡水)’, 이 낯선 단어는 세월호 침몰의 원인으로 등장했던 용어다. 그 기억을 소환해 본다.
세월호 사고의 주원인은 고속항해 중 급격한 각도의 변침으로 배가 왼쪽으로 기울어 졌다. 이때 선체 내의 화물들이 좌측 쏠림 현상으로 배의 복원력이 상실되었다. 세월호는 화물을 정량 톤수보다 훨씬 초과 선적했고, 대신 배의 평형수를 초과 감소시킨 결과로 밝혀졌다.
배는 물 속에 적당히 가라앉아야 배의 프로펠러(추진기)와 방향타가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안전한
항해를 할 수 있다. 만약 배가 물 위로 떠 오르면 프로펠러의 효율이 떨어지고, 배의 무게 중심이 높아지거나 한쪽으로 쏠리는, 즉 균형을 상실하는 위험이 발생하게 된다.
이런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배의 밑바닥에는 ‘발라스트 탱크(Ballast Tank: 물을 담는 공간)’가 설치되어 있다. 이 탱크에 채우는 바닷물을 ‘평형수 (Ballast Water)’라고 한다. ‘Ballast’는 영어의 ‘Bale(짐짝)’과 게르만어의 ‘last(짐)’가 결합된 합성어로 만들어 졌다. 철도의 선로에 깔린 자갈이나 시멘트 콘크리트의 집합체를 발라스트(Ballast)라 한다. 침목이나 콘크리트 받침으로 열차의 중량을 지면에 고르게 전달하여 열차의 탈선을 방지한다.
배에 화물을 선적하면 무게 때문에 배가 가라앉고, 화물을 하적하면 가벼워져서 물 위로 뜨게 된다. 따라서 화물을 하적하면 반드시 발라스트 탱크에 평형수(海水)를 채워 배를 가라앉혀서 배의 중심과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화물을 선적하면 그 무게만큼 채워있던 평형수를 빼내게 된다. 또, 한쪽으로 기울면 반대쪽에 평형수를 채워 좌우 균형도 맞추어야 한다. 배의 무게와 균형을 잡는 일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경험이 많은 1등항해사가 주로 관리한다.
선박의 평형수는 배를 안전하게 하지만, 해양 생태계에 큰 변화를 끼치는 단점도 있다. 최근 미국 동부근해에는 지중해의 얼룩무늬홍합이 번식하여 미국 토종홍합을 몰아내는 생태계의 변화가 발견되었다. 지중해 홍합이 발도 날개도 없는데 어떻게 미국 동부해에까지 와서 서식하게 되었을까. 지중해나 유럽에서 온 선박들의 평형수에 실려와서 미국 항구에서 평형수를 배출시킬 때 떨어진 것이다.
지상에서는 인종들의 이민(移民)이 있지만, 해저에도 생태계의 이전(移轉)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국제해사기구(IMO)의 보고서에 의하면 세계 각국을 이동하는 배의 연간 평형수 배출은 약 100억톤에 달해, 약 7000여 종의 해양생물이 이동하므로 평형수가 해양 생태계를 변화시키는 주범이라고 발표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발라스트 탱크에 여과용 필터(Filter) 설치를 권고하고 있다.
사람과 배는 상호 공통점이 있다. 사람이 물을 마시면 일정시간이 지난 후 배설하듯이, 배도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물을 마시고 배설한다. 사람(특히 여성)은 하반신 노출을 심히 부끄러워 한다. 배도 화물의 무게나 평형수의 무게로 인해 좀처럼 아랫부분(빨간색 하체)을 물 위로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배의 아랫부분은 수리를 위해 육지에 오를 때만 볼 수 있다. 마치 여성의 하체를 침대에 오를 때만 볼 수 있듯이. 여자와 배는 나이가 들수록 화장발이 진해진다, 화장도 자주 하고, 피부보호에 더 많은 투자를 하게 된다.
바닷바람과 파도는 배의 피부를 금방 녹(綠) 쓸도록 부식(腐蝕)을 촉진한다. 따라서 선원들은 시간 날 때마다 선박의 피부에 녹을 벗기고 페인팅을 한다. 이 작업을 여성에게 화장시키는 것에 비유한다. 그래서 배는 항상 여성으로 대접받는다. 영어로 She와 Ship으로.
배가 풍랑에 쉼 없이 흔들리면서도 앞으로 항해하 듯이, 사람도 끊임없이 흔들어대는 세파에 시달리며 내일을 향해 살아가고 있다. 배에 평형수가 필요하 듯이, 사람에게도 평정심(平靜心)이 필요하다. 평정심이란 외부의 어떤 충격에도 감정의 기복없이 동요하거나 허둥대지 않고 힝상 평안한 감정을 유지하는 마음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