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州 “성폭행 당해도 낙태 못한다”... 임신 6주 이후 금지 파장
진보 단체 시행 중단 긴급 신청…연방 대법 9명 중 5명 기각 의견
제3자 제소하면 1만 달러 보상금…바이든 “헌법적 권리 무참히 침해”
텍사스주에서 여성의 낙태를 사실상 금지하는 강력한 낙태제한법이 1일 발효됐다. 이는 미국이 1970년대부터 반세기간 낙태를 여성의 결정권 영역으로 보고 허용한 흐름을 정면으로 뒤집었다는 평가를 낳고 있다. 텍사스는 ‘미 보수의 심장’으로 불리는 지역이자 캘리포니아에 이어 둘째로 인구가 많은 주(州)여서 파장이 커지고 있다.
이날 시행된 법은 낙태 금지 시기를 기존의 ‘임신 20주 이후’에서 ‘6주 이후’로 앞당기는 것이 골자다. 공화당이 장악한 텍사스 주의회는 6주 된 태아는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는 점을 내세워 이 법을 ‘심장박동법(Heartbeat Bill)’으로 명명해 지난 5월 통과시켰고, 그레그 애벗 텍사스 주지사가 같은 달 법안에 서명했다. 임신 6주는 임신부가 임신을 자각하기 어렵고 병원의 진단도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낙태 금지 시기를 임신 사실 자체를 모를 수도 있는 시점으로 앞당겨 사실상 낙태 금지와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이다. 성폭행을 당했거나 근친 간 임신을 한 경우에도 낙태를 할 수 없도록 했다.
이 법은 또 전례 없는 조항을 담고 있는데, 낙태 고발·단속을 불특정 다수 시민에게 맡겼다는 점이다. 낙태를 감행한 여성은 물론 시술을 한 병원, 이들을 도운 이들에 대해 제3자가 소송을 걸 수 있게 하고 주정부는 제소자가 승소할 경우 최소 1만달러의 보상금을 지급하게 했다. 일종의 ‘낙태 감시 자경단’을 구성해놓고 주정부는 낙태 단속에서 표면적으론 손을 뗀 것이다. 이는 여성계와 진보 단체 등이 주정부를 상대로 법 시행 정지 가처분 신청 등을 하는 것을 봉쇄하고 민간끼리의 다툼으로 돌리려는 의도라고 뉴욕타임스는 분석했다.
미국에선 1970년대 초까지 대부분 주에서 낙태를 처벌했다. 그러나 1973년 태아가 모체 밖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점인 임신 22~24주 이전 낙태권을 보장한 연방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판결이 나온 이래 임신 중기까지의 낙태가 허용돼왔다. 일부 주에서 낙태 가능 시기를 13~15주까지 앞당기기도 했지만 이번 텍사스처럼 임신 초기 낙태까지 금지한 법이 시행된 건 48년 만에 처음이다.
법 시행을 두고 논란도 커지고 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1일 성명을 내 “이번 낙태제한법은 ‘로 대 웨이드’ 판결에서 보장된 낙태할 헌법적 권리를 무참하게 침해했다”며 “여성의 권리를 지켜야 한다”고 밝혔다. 낙태 시술 병원들과 진보 단체 등은 지난달 30일 연방대법원에 텍사스의 낙태제한법 시행을 중단해달라는 긴급 신청서를 제출했지만 대법원은 이날 이를 기각했다. 9명의 대법관 중 5명이 기각 편에 섰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인용 쪽이었다.
앞서 지난 6월 텍사스의 한 고교에선 졸업 연설에 나선 여학생이 이 법을 겨냥해 “내 몸을 두고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며 “우리는 스스로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뺏겼다. 성폭행당하거나 피임에 실패했을 때 내 미래도 꺾이는 것”이라고 했다. 법안 발효 전날인 31일에는 평소보다 많은 여성들이 낙태 시술을 받으려고 병원에 몰려들었다고 현지 매체들은 전했다.
정시행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