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이야기] ‘애플씨드’(사과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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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야기] ‘애플씨드’(사과씨앗)

웹마스터

제이슨 송

뉴커버넌트 아카데미 교장 


1774년 존 채프먼이란 아기가 매사추세츠주(州)에서 태어났다. 쟌과 그의 가족은 그 당시 미국의 서부 국경지역이던 펜실베이니아주로 이주했고, 쟌은 십대시절 사과즙 제조공장에서 일했다. 그 때 주민의 일부는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다수는 서부행을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인디언 습격, 그리고 서부지역이 너무 험하고 미개발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채프먼은 열 여덟살 때 열한 살배기 동생 나다니엘과 함께 용기를 내어 오하이오주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서 약 10년동안 과수원에서 농장일을 배웠다. 그러던 어느날 채프먼은 압착 과정 후 남은 펜실베이니아 사과즙 공장의 사과씨앗 더미를 기억한다. 사람들은 쓸모없는 사과씨앗을 그냥 썩게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존은 그 사과 씨앗을 서부 개척지에 심어야겠다는 꿈을 갖는다. 


여러 해에 걸쳐 구체적 사전 계획을 마친 채프먼은 큰 자루 여러 개에 씨앗을 가득 채우고 서쪽으로 향했다. 그는 여행을 하며 길가에 사과나무를 심었고, 작은 카약이나 용골에도 사과씨를 가득 싣고 오하이오 지역의 여러 강을 오가며 씨를 심었다. 평생 죽을 때까지 그 일을 했다.


그는 왜 남 보기에 무모한 일을 시작했을까? 그 당시 서부지역의 무한한 가능성을 예측한 사람은 많았다. 그리고, 수천, 수만의 정착민이 서부로 이주해 국가의 서부 확장에 이바지할 것이란 비전을 갖고 있던 정치인이나 사업가도 꽤 된다. 그러나 존 채프먼은 미개척 서부지역 도전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서부로 이주해 정착하려 할 때 양식이 턱없이 부족할 것을 예측했다. 그리고 미개척지에서 길을 잃고 헤맬 수도 있음을 인지했다. 채프먼은 그런 사람을 돕고 싶었다. 그래서 개척자가 여행할 때 사과를 배불리 따 먹고, 또 정착지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사과나무를 마치 도로 표지판같이 심어놓은 것이다. 그는 또 미래에 농장을 만들수 있을만한 벌판에 무작위로 사과 씨앗을 심어 놓았다. 수십년 후 누군가 큰 수확을 거둘 것을 염두에 두고 말이다.


채프먼은 인디언과 소통하는 방법도 배웠고 인디언들도 자연을 사랑하는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개척지의 여행과 삶은 매우 어렵고 불편했다. 적당히 거주할 만한 집도 없었고 닦아 놓은 길도 없었다. 때로는 추위에 떨었고, 한 번은 사과를 재배하다 나무가지에 목이 걸려 질식사할 뻔 했다. 이외에도 채프먼은 자신의 꿈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직면했다. 그러나 그럴때마다 그는 신앙에 기대었다. 


그는 땅에 뿌리는 씨앗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마음과 영혼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야 한다고 믿었다. 즉, 몸과 영혼의 필요 둘 다 제공해 주는 것이 채프먼의 꿈이요 비전이었다. 그런데 그런 채프먼을 광신자요 미친 사람이라고 부른 이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이생의 소유와 이익에 초점을 두고 살았기에 그랬고 신앙의 꿈을 갖은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미래에 대한 꿈과 비전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는 사람, 즉 미래를 위해 심는 사람은 타인의 승인이나 확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채프먼을 미친 사람이라고 취급한 사람도 있었지만, 결국 그는 초기 미국 역사에 중추적인 인물로 기억된다. 그의 묘지는 인디애나의 작은 공원에 있다. 


이 묘지는 그의 삶과 공헌을 평가하기 위해 세워졌고, 묘비를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 조니 애플씨드 (사과씨앗)란 다른 이름이 새겨져있다. 채프먼의 노고때문에 삶이 좀 더 수월해진 정착민들이 거의 200년 전에 그에게 붙여준 애정 어린 이름이다. 그 이름은 거의 모든 교과서에 실려있고 미국에서 교육받는 초등학생은 다 그의 삶에 대해 배운다. 


미래를 위해 무엇을 심고 있는지 오늘 내 자신을 돌아본다. 내 자신이 조니 애플씨드같은 사람이 되고 싶고 또 그와 같은 사람이 될 차세대 리더를 배출하고 싶다. 그 꿈은 꼭 이루어질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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