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21세기의 나직경(羅織經) 신도들


홈 > 로컬뉴스 > 로컬뉴스
로컬뉴스

[이우근 칼럼] 21세기의 나직경(羅織經) 신도들

웹마스터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그러면 누구든지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 군중심리를 꿰뚫어본 나치 선전부장 괴벨스의 말이다. “거짓말도 반복하면 진실이 된다.” “대중은 작은 거짓말보다 큰 거짓말에 더 잘 속는다.” 인간의 지성을 한껏 조롱한 괴벨스의 신념이다. 실제로 당시의 많은 독일인들이 그의 거짓말에 속아 ‘히틀러 만세!’를 외쳐댔다. 국민을 어리석은 집단으로 취급한 괴벨스는 대중을 분노와 증오의 광기로 몰아넣는 선전·선동과 중상모략의 귀재였다. 


그렇지만 중상모략의 원조는 따로 있다. 중국 당나라 때 권신(權臣)이었던 내준신(來俊臣)이 바로 그 원조다. 거리의 한량으로 떠돌다가 강도강간범으로 감옥에 갇힌 내준신은 자기를 엄하게 대하는 간수를 측천무후에게 밀고해 석방되고, 그 뒤에는 간교한 처세술로 권력의 중심부에 들어간다. 공포의 철권통치로 악명 높은 측천무후의 손발이 된 내준신은 터무니없는 범죄를 날조해 수많은 정적들을 제거했다. 


내준신은 나직경(羅織經)이라는 범죄날조 교과서까지 저술했다. ‘나직’은 없는 죄를 만들어 덮어씌운다는 뜻이다. 조그만 혐의의 흔적이라도 발견되면 망나니들을 끌어 모아 거짓 사건을 만들게 하고, 온 나라에 헛소문을 퍼뜨렸다. 그리고는 온갖 죄명을 엮어 단기간에 정적과 그 가족 1000여 명을 몰살하고 그 재산을 빼앗았다. 누구든지 그의 눈 밖에 나면 목숨 버릴 각오를 해야 했다. 나직경은 그 자신의 범죄고백서나 다름없다. 내준신은 중국역사상 최악의 혹리(酷吏)라는 별명을 얻었다. 


나직경의 범죄날조 방식을 요약하면, 제거할 정적을 지목하고 그에게 불리한 거짓소문을 만들어 널리 퍼뜨리며, 증거를 조작하거나 모진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받아낸 다음, 다른 정적들까지 연루자로 끌어들여 함께 처벌하는 식이다. 범죄날조의 핵심은 첫째 거짓소문 즉 가짜뉴스로 여론몰이를 하는 것, 둘째 증거를 조작하고 거짓 증인을 내세우는 것이다. 나중에는 내준신 자신도 친구의 밀고로 목숨을 잃게 되는데, 백성들은 그의 시체에서 살점을 발라냈다고 한다. 


훗날 편찬된 『구당서(舊唐書)』는 나직경의 의도를 ‘앞사람들을 모두 엮어 모반죄로 얽어매는 것’(皆網羅前人 織成反狀)이라고 정리했다. 과거의 권력층을 모두 적폐세력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헛소문과 증거조작이 내준신의 특허품은 아니다. 동서고금의 권력투쟁 대부분이 나직경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들이었다. 조선 중기, 사림(士林)의 개혁파 조광조가 희생된 기묘사화(己卯士禍)도 같은 방식으로 이뤄졌다. 주초위왕(走肖爲王)의 모함은 거짓소문과 증거조작을 한꺼번에 해치운 범죄날조 아니던가. 


현대의 한국정치라고 다를까. 예전에 어느 대통령후보의 ◯◯건설 뇌물 파문, 자녀 병역비리 의혹 등이 선거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나중에 모두 거짓소문으로 밝혀졌다. 그렇다고 선거결과가 뒤집히지도 않았다. 광우병 촛불시위 때의 ‘뇌송송 구멍탁’ 구호도 결국 실체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지만, 정권은 이미 허수아비로 전락한 뒤였다. 정치선동꾼들이 여전히 나직경을 알뜰히 떠받드는 이유다. 그네들 앞에서 증거인멸은 증거보전으로, 학력 위조는 사회적 관행으로 뒤바뀐다. 


최근 어느 야당 대통령후보가 대리고발 사주 의혹에 휘말렸다. 문제의 후보가 과연 고발을 사주했는지, 아니면 오히려 다른 누군가가 거짓 제보를 사주했는지, 아직은 사실관계가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야는 서로 상대방의 정치공작이라고 비난을 퍼붓는다. 사실 확인 없이 뜬소문과 추측만으로 서로에게 유죄판결을 내리는 셈이다. 후보의 자질과 도덕성을 검증한다는 명분 아래 거짓소문과 가짜뉴스로 상대 후보를 음해하는 중상모략이 선거기간 내내 이어질 모양이다. 


어떤 후보를 지지하는가는 유권자의 권리요 자유로운 선택이다. 다만 흑색선전·선동에 놀아나 스스로 바보 취급을 당하는 유권자는 공정선거를 말할 자격이 없다. 1500년 전 당나라의 내준신과 나치의 괴벨스를 섬기는 나직경 신도들이 21세기 자유민주의 나라에서 국민을 조롱하며 날뛰는 정치현실이 역겨울 따름이다.


7cfa1cd9cafc449bbbd52cf9a760350b_1632086254_9044.jpg

이우근 칼럼니스트: 변호사로 현재 숙명여대 석좌교수로 있다. 경기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서울중앙법원장 등 법관으로 근무하던 30년 동안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문학, 철학 등 인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현재는 PEN International, Korea 회원으로서 인권위원장을,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서 문인권익옹호위원장을, 학교법인 이화학당 이사를, Seoul National Symphony Orchestra에서 명예지휘자를, FEBC(극동방송)에서 신앙 칼럼을 맡고 있다.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