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한국전과 할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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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한국전과 할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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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원 

변호사 



올해는 한국전이 일어난지 71년째 되는 날이다. 6.25가 발발한지 70년이 넘는데도 아직도 북침이니 하는 황당무계한 말이 오가는게 현실이다. 6.25를 떠올리면 지금은 고인이 된 친할머니, 외할머니 생각이 많이 난다. 너무나 달랐고 친하지도 않았던 두 분이지만 과거 두 분이 겪으셨던 전쟁을 생각하면 사후에 두 분들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된다.

 

9.28 서울 수복이 된 뒤 다시 피난을 가게 된 어머니 가족은 처음에는 기차를 타고 평택까지 갔으나 기차가 사흘이나 움직이지 않는 사이 잠깐 외할머니, 어머니, 외삼촌만 기차에서 내렸다. 그때 기차가 외할아버지와 이삿짐만 싣고 떠나버리는 바람에 다른 가족들은 평택에서 대구까지 걸어서 가셨다고 한다. 

 

충청남도 연기군 전동면으로 피난을 가서 하룻밤을 지내는데 외할머니는 그 집 주인과 한참 동안 협상(?)을 한 뒤 거기까지 무겁게 지고 왔던 미제 싱거재봉틀을 그 집에 맡기셨다. 그런데 외할머니께서 그 전날 밤새도록 잠도 안 주무시고 재봉틀과 씨름하셨단다. 외할머니는 나중에 대구에서 외할아버지를 만난 뒤 가서 맡겨 놓은 재봉틀 찾아 달라고 부탁하셨다. 외할아버지는 “그게 벌써 집주인이 팔아먹었지 있을 리가 없다”고 코웃음을 쳤다고 한다. 그래도 외할머니의 당부대로 가셨더니 집주인이 재봉틀을 팔려고 했다가 못 팔았다고 하면서 외할아버지에게 평생 아내 말만 들으면 잘 살 것이라고 말했단다. 초등학교도 졸업 못 하신 외할머니는 재봉틀을 주인에게 맡기기 전에 밤새도록 중요한 부속품들을 모두 빼놓았기 때문에 팔래야 팔 수도 없었던 것이었다.

 

이렇게 고생했던 외가와 달리 친가는 사업하시던 할아버지 덕분에 트럭을 타고 비교적 편하게 피난갈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큰아버지를 전쟁에 잃어버리신 큰 아픔을 겪으셨다. 평소에 말이 없으셨던 할아버지는 큰 아버지의 전사통지서를 피란지인 충청도에서 받으시고 혼자 그 일을 비밀로 하셨다. 그러던 어느날 할아버지는 할머니께 절에 놀러 가자고 하셨다. 영문을 모르고 따라 가신 할머니에게 호젓한 곳에 가시더니 할아버지께서 “여기서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으니 실컷 울어”라고 말하셨다. 할머니가 “내가 왜 울어요?”라고 물으시니 할아버지는 “인용이 (큰 아버지)가 죽었어” 하시며 연신 담배를 피워 물으셨단다. 다 자란 잘 생기고 믿음직하던 맏아들을 잃으셔서 울다 울다 지친 할머니에게 할아버지는 담배 한 대를 불 붙여 주시면서 “여기서만 울고 다른 자식들 앞에선 울지 말고…. 속 터지면 담배나 피우던 지…”라고 말하셨다고.

 

그때부터 친할머니는 골초가 되셨다. 우리 집에는 예전에 노란색 알루미늄 양푼이 하나 있었다. 어머니가 시집 오셔서 거기에 김치를 버무리면 할머니가 화가 나서 그걸 씻어서 치우셨단다. 할머니가 아니라 할머니의 조카되는 분에게 화 내시는 이유를 들었는데, 그 양푼이 할머니가 보훈처로부터 전사자 부모라고 받으신 것이기 때문이란다. 즉, 마치 큰 아들이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준 선물이라고 생각하셔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고 귀하게 간직하셨다는 것이다.

 

친할머니나 외할머니가 두 분 모두 고교 문 앞에도 못 가셨던 분들이지만 부모님을 훌륭하게 키우신 존경스러운 분들이다. 그분들 덕분에 수천년 가난했던 후진국이 이제는 G20에 포함될 정도로 존경받는 나라가 됐다. 6.25 71주년을 맞아 오래 전에 돌아가신 두분 할머니들을 다시 생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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