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이야기] 제자의 사망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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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야기] 제자의 사망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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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슨 송

뉴커버넌트 아카데미 교장 


필자가 24년 간 섬교온 새언약 초중고등학교를 2020년에 졸업한 여학생이 사망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믿기 어려웠다. 그 학생의 부모와 직접 통화해 보니, 아 글쎄 2022년 봄 백혈병 판정을 받아 1차 방사선 치료를 잘 마쳤으나 12월에 2차 치료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 학생은 참 발랄하고 예쁘고 똑똑한 학생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12년동안 줄곧 우리 학교생이었기에 오래동안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USC에 진학했고 누구와 비교해도 모자랄 것 없는 그런 학생이었다. 그렇기에 이 학생의 사망소식은 청천벽력 같았다. 교사인 내가 그렇게 느꼈다면 외동딸을 애지중지 키워온 부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이런 일이 벌어질 때 "왜 고통이 존재하는가"란 질문을 하게 된다. 이 학생같이 꽃도 피우지 못한 채 사망하거나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볼 때, 선하고 공평하고 전지전능한 신(神)의 존재와 능력과 성품을 의심하게 된다. 지면을 통해 이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답을 전하고자 한다.

첫째, 고통은 존재한다. 불교나 동양적 종교는 업보와 윤회(輪廻)에서 해방되어 열반(涅媻), 즉 고통과 욕망과 자의식이 없는 초월의 경지에 도달하는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기독교 세계관은 원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세상의 특징 중 하나가 고통이기에 절대 고통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벗어나는데 초점을 두지 않는다.  


둘째, 고통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고통과 고난을 겪는다. 기독교인이라고 만사형통하고 무병장수하지 않는다. 돈이 많다고 고통을 피할 수 없다. 정도와 형태의 차이는 있지만 남녀노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통은 모두에게 찾아온다. 


셋째, 고통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의지(free will)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예를 들어 큰 교통사고가 발생하기 직전에 신이 개입해 사고가 나지 않게 해 준다고 가정해 보자. 신이 매번 그렇게 한다면 모든 사고, 질병, 고통, 가난, 그리고 재앙은 사라질 것이다. 허나 그 전제 하에 자유의지란 있을 수 없다. 인간이 자신의 실수에 책임을 질 필요도 없고, 또 타인의 실수나 잘못으로 인한 피해를 전혀 받지 않는다면 자유의지는 사실상 무형지물이 된다. 신의 위상도 그저 인간이 원하는 소원을 들어주는 알라딘의 요술램프 속에 요정으로 하락한다.


넷째, 고통은 삶의 의미와 목적과 가치를 깨닫게 해 준다. 그저 먹고 마시고 돈을 버는 게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며, 육신의 안목과 정욕을 추구하기보다 목적과 의미있는 삶을 살게 해 준다. 더 나아가 고통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을 찾게 만든다. 이 점은 나르니아로 유명한 C.S. Lewis가 “고통의 문제(the Problem of Pain)”, 그리고 필립 얀시가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란 책을 통해 잘 다뤘다.


다섯째, 기독교의 신은 인간이 겪는 고통 가운데 함께 하며 위로하는 목자다. 그 분은 고통받는 자를 외면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도가 고통스러워 할 때 더 가까이 다가와 위로해 주고 안아주고 품어준다. 기독교의 신은 인간을 자식으로 여기는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인간은 죽음을 가장 큰 고통, 해결이 불가능한 숙제로 여기지만, 시간과 공간과 물질을 초월하는 신에게 인간의 죽음이란 연속체(continuum)내지 스펙트럼의 한 획, 한 점(點)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전지전능 무소부재의 신에게 인간의 죽음이란 이생에서 영생으로 옮겨지는 관문일 뿐이다.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과 끈끈한 관계를 형성하고 사는 존재이기에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고통스러워 하거나 사망할 때 슬프고 답답하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은 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 더 큰 그림이 보인다. 이 점은 결코 무지(無知)나 광적 신앙을 기반으로 한 억지가 아니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파스칼, 톨스토이, 칼빈, 체스터튼, 어거스틴, 츠빙글리, 바르트 등의 위대한 철학자, 과학자, 저자, 신학자들도 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 무엇보다 성경의 예수가 그렇게 가르쳤다.


꽃다운 외동딸을 먼저 천국으로 보내고 애통해 하는 부모를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초자연적 평강과 부활의 확신, 그리고 천국의 소망을 통해 딸을 다시 만날 날을 인내하며 기다리도록 돕는 것이다. 


장례식 조사(弔辭)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제자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오드리아, 발랄하고 예쁘고 쿨 한 너의 모습은 이제 기억으로만 간직할 수 있겠구나. 이 세상에서 큰 일을 잘 감당해 낼 수 있었겠지만 이제 가장 아름답고 멋지고 건강한 모습으로 주님과 함께 있는 네가 부럽기도 하다. 하지만, 엄마 아빠가 너를 많이 많이 보고 싶어 무척 힘들어 할 것이다. 그러니 가끔 엄마 아빠 꿈에 나타나 주렴. 얼마나 밝고 멋지게 잘 지내는지 보여 드리렴. 하늘나라에서도 그렇게 효도하는 귀한 딸이 되거라. 사랑한다. 우리 다시 만나자, 천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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