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훈의 속닥속닥] 달 이름에도 멋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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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훈의 속닥속닥] 달 이름에도 멋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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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랗게 매실이 익는 계절 집집마다 비가 내려/ 풀빛 푸른 연못에서 개구리들이 우는데/ 오마 던 그님은 이슥토록 오지 않고/ 하릴없이 바둑돌 똑똑 등불 심지 떨어지네(黃梅時節家家雨/ 靑草池塘處處蛙/ 有約不來過夜半/ 閑敲棋子落燈火)’ 

남송 시인 조사수(趙師秀·1170~1219)의 ‘약객(約客)’이란 시다. 매실이 달곰한 내음을 뿜으며 익어가는 계절,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개구리들은 울어대는데 온다던 사람은 밤이 늦도록 코빼기도 안 비치니…, 애꿎은 바둑돌만 잡고 판에다 똑똑-.


#아직 달빛이 시린 어느 황혼 무렵, 어디선가 은은한 청향이 스치는 듯 하드니 어느 바람에 매실로 맺어져 노랗게 익어가는 조화(造化)가 눈부시다. 황매시절에는 비가 흔하다. 황매시절은 늦봄부터 초여름 사이에 매실이 노랗게 익어가는 시기, 즉 음력 5월을 가리킨다. 예전엔 중국하고도 강남(江南)에서 그랬는데 십여 년 전부턴가 이젠 우리 땅에서도 매한가지다. 온난화가 장마도 앞당기나보다. 하긴 여름 고팽이인 하지(夏至)도 지나고 곧 소서(小暑)에 초복(初伏)도 코앞으로 닥칠 테니 장마가 시작된대도 전혀 낯설지 않다.

 

#요즘은 무슨 달하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해당 숫자로 일 년 열두 달을 가리킨다. 삼월, 칠월, 구월 등등처럼. 정말 멋대가리라곤 ‘일(1)’도 없다. 하지만 예전엔 달랐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갬성’이 있었다. 인문학적 풍류가 넘쳤다. 요즘 같은 때 내리는 비는 매실이 익을 때 내리는 비라고 해서 매우(梅雨)라고 한다. 그런데 시방 달로 치면 음력 5월이어서 선조들은 “뭔 달이여?”하면  “5월”말고도 “매우지 뭐여!”라고 했다. ‘매우’가 이달의 별칭으로 쓰였다. 우리말로 ‘매실비’다. ‘매화비’보다는 조금 뭣하지만 그래도 아취가 있지 않나? 매우의 연원은 중국 한(漢)나라 응소(應劭)의 『풍속통(風俗通)』에 보인다. 거기엔 ‘5월에 매실을 떨구는 바람이 불어오면 강(江), 회(淮) 지역의 사람들은 신풍(信風)이라고 한다. 이때 내리는 장맛비를 매우(梅雨)라고 한다(五月有落梅風 江淮以爲信風 又有霖霪 號爲梅雨)’고 나온다. 매자우(梅子雨), 매림(梅林), 이라고도 한다. 매월(梅月), 매천(梅天), 매하(梅夏) 등도 같은 취지다.


#이 같이 자연현상을 따라 달의 별칭으로 삼기론 조염(早炎), 중하(中夏), 하오(夏五) 등도 마찬가지다. ‘조염’의 ‘염’은 불꽃이 위로 올라간다는 뜻이다.『설문(說文)』「염부(炎部)」편에 “염은 불꽃이 올라간다(炎火光上也)”라는 구절이 있으며, 중국 당(唐)나라 한유(韓愈)는 ‘남산(南山)’이란 시에서 ‘한여름 불꽃 더위에 모든 초목 무성하고 음울한 기운 점점 쌓여가네(夏炎百木盛 陰鬱增埋覆)’라고 읊었다. ‘중하’는 여름의 한창때, 곧 한여름을 가리킨다.


#그런가 하면 여름을 대표하는 동식물을 등장시켜 달 이름을 대신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별칭으로 ‘명조(鳴蜩)’란 게 있다. 명조란 말매미를 뜻한다. 시경(詩經)』‘빈풍(豳風) 칠월(七月)’에 ‘4월에 강아지풀이 패고 5월에 말매미가 울며(四月秀葽 五月鳴蜩)’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서 5월하면 ‘명조’라고 부르게 됐다. 또 이 시기에는 석류꽃이 피어 벌어진다 해서 ‘유열(榴裂)’이라고도 했다. 달리 유화(榴花), 유하(榴夏), 유화월(榴花月)이라고도 한다. 석류꽃은 음력 5월에 붉은색으로 피며 가지 끝에 1~5개씩 달린다. 포월(蒲月)도 오월의 별칭인데 창포(菖蒲) 끓인 물로 머리를 감던 단오절(端午節)이 들어 있는 달이란 뜻이다. 


#그런가 하면 사뭇 철학적인 이름도 있다. ‘구월(姤月)’과 ‘고월(皐月)’은 계절의 상황을 역(易)의 변화로 견줘 나타낸 달 이름들이다. 우선 ‘구월’은 『주역(周易)』의 64괘(卦) 중 12괘를 뽑아 일 년 열두 달에 배속시켰을 때 구괘(姤卦)에 해당하는 달이라는 뜻이다. 구괘는 상괘(上卦)가 건괘(建卦·☰)이고, 하괘(下卦)가 풍괘(風卦·☴)로 이루어진 괘이다. 동짓달부터 양기(陽氣)가 처음 생겨나는 것으로 보고 양효(陽爻)가 아래에서 처음 생겨나는 복괘(復卦)를 음력 11월에 배속시켰으므로 구괘는 음력 5월에 해당한다. 따라서 음력 오월에 더위가 시작되지만 역학적으론 이미 찬 기운(陰氣)을 품고 있다는 얘기다. ‘고월’도 비슷한 논리다. 


#오월의 별칭 가운데 가장 고운 것은 ‘훈풍(薰風). 글자 그대로 ‘훈훈한 바람’이라는 뜻으로  그 연원은 중국 한(漢)나라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오제기(五帝記)」에 ‘남방의 훈훈한 바람이여 우리 백성의 노여움을 풀어주리라(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는 데 있다. 화풍(和風)이라고도 한다. 훈풍은 요즘 기상청에서 사용하는 ‘풍력계급’의 네 번째 등급인 ‘건들바람(moderate breeze)’에 해당한다. 초속 5.5~7.9m로 부는 바람으로 먼지가 일어나고 종이가 날리며 흰 파도를 일으키고 작은 나뭇가지를 흔들리게 할 정도의 세기다.


#이밖에 오행(五行)에 따라 붙인 주양(朱陽), 주하(朱夏), 주명(朱明)이 았고, 음률에 따라 십이율(十二律)을 적용해 일곱 번째인 유빈(蕤賓)을 음력 5월의 별칭(동짓달을 정월로 삼던 유습이다!)으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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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훈 칼럼니스트: 고려대 정외과를 졸업했다. 한국 중앙일보에서 경찰, 국방부 출입 등 사회부기자를 거쳐 문화재 및 인터뷰 전문기자를 지냈다. 향수를 자극하는 사투리나 아름다운 우리말 사용에 탁월하고 유려한 문장을 더해, 한국의 전통문화와 특산물 소개 등에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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