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칼럼] 무엇으로 먼저 채울 것인가?
‘죤 벡’과 ‘토마스 데이빈 포트’가 쓴 ‘관심의 경제학’이라는 책을 보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관심의 양은 결국 한정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세상의 정치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불리한 상황이 생기면 다른 스포츠나 전쟁과 같은 큰 사건을 만들어 관심을 돌리게 만드는 것을 종종 본다.
때때로 이런 관심 전환이 효과를 본다. 이유는 사람의 관심의 총량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현대는 넘치는 인터넷 정보 속에 필요 없고 쓸데없는 가짜 정보가 너무 쉽게, 많이 전달되는 시대이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진짜가 들어갈 마음의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는 치명적 약점이 나타나고 있다.
긍정보다 항상 더 빠르게 전파되는 부정적인 것들이 먼저 마음을 선점하면 실제로 좋은 것들은 들어올 자리가 없게 되고 만다. 특별히 마지막 시대는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 넘쳐나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실족하는 대형 스캔들과 배신과 미움의 소식들과 불법이 가득할 것이기에 내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의 분별은 정말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이 땅에 계실 동안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고, 눌린 자를 진리로 자유케 하고, 하늘나라를 선포하며 오직 사랑과 희생으로 사셨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고 참된 소망으로 삶이 변화되었으며 구원받은 자가 되어 평안과 기쁨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예수를 만나고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특징은 다 ‘패역’한 세대의 사람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패역’이란 완고함, 들으려고 하지 않는 고집불통의 마음, 받아들이는 수용성이 없는 마음이다. 이미 자신들의 욕심과 편견과 고집이 가득 차 있기에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그 유명한 가룟 유다의 실패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13:2).” 이미 마귀의 생각을 받아들이니까 마음에 마귀의 생각이 가득한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세족식 사랑도, 최후 만찬의 은혜도 그에게는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먼저 받아들인 생각대로 행동하므로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현대의 우리는 어떤가? 만약 예수가 진리이고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원수마귀가 있다면, 마땅히 세상의 거짓되고 부정적인 것들을 떠나 먼저 진리를 채워야 할 것이다. 예수의 진리로 말씀으로 우리를 먼저 채우지 않으면 세상 생각이나 마귀의 생각이 우리 마음을 채우게 된다. 그리고 일단 세상 것으로 우리 마음이 채워지면 진리를 담을 공간은 없다.
하나님은 믿음의 롤 모델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제일 먼저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다.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에게 바라보는 동서남북의 모든 땅을 주시겠다는 비전을 주시고, 또 밤하늘의 뭇별을 세어보라 하시면서 자손이 이와 같이 많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으로 채워주셨다.
바로 이것만이 하늘의 은혜와 능력이 임하여 육신의 죄성과 세상의 염려와 두려움을 이기게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한 번 뿐인 귀한 인생, 먼저 구세주 예수를 채움으로 목적이 분명해지고 가치관이 달라지는 삶을 경험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