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광의 행복칼럼] 자성과 회개가 없는 사회!
월드쉐어USA 대표
오월을 한국에서 보내며 지방선거를 지켜보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변호사, 기자, 교수 출신의 정치인들이 진영의 논리로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한다. 이미 드러난 일을 멀쩡한 거짓말로 강변한다. 그 미친 주장을 지지자들이 따른다. 이런 상황이 정계만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비극이다. 눈부신 발달로 선진국에 진입한 대한민국의 믿기 어려운 현실이다.
소설가 이청준은 이 모습을 예언하듯 “미친 사과나무(1971)”라는 단편소설을 썼다.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 마을 사람들이 함께 산을 개간해 배나무를 심었다. 배를 수확해 가난도 벗어나고, 아이들 공부도 시키기 위해 열심히 심고 가꾸었다. 마을 사람들은 배나무를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수년 후에 배가 아니라 사과가 열렸다. 애초에 실수로 사과나무를 잘못 심었던 것이다. 배나무라고 믿고, 배를 기대했는데 사과가 열리자 온 마을 사람들은 충격과 실망에 빠졌다. 실망이 너무 커서 그들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사과라고 부르지 않고 ‘배’라고 부르기로 했다. 온 마을이 합의하고 멀쩡한 사과를 배라고 불렀다.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마을에 이미 사과나무가 있었고 그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열리고 있었기에 기존의 사과 명칭이 문제였다. 혼란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그것도 배라고 부르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그들이 배를 팔러 시장에 나가면 다른 동네 사람들이 그것은 사과라며 그들을 비웃었다. 아무리 배라고 우겨도 사과는 사과였다.
마을 사람들은 분노했다. 기대했던 배가 아니라 사과를 맺은 그 나무에 대한 배신감과 옆 마을 사람들 조롱에 대한 수모감이 극에 달하자 그들은 모두 미쳐 버렸다. 그들은 일제히 산으로 달려가 그 나무들을 뽑아 버렸다. 배나무라 우겼던 미친 사과나무를 뽑고야 그들은 제 정신을 찾았다.
이상은 이청준의 ‘미친 사과나무‘의 줄거리다. 사회 기득권의 부조리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졌던 이청준은 실수를 범하는 인간의 약함과 잘못을 우기는 인간의 악함을 지적한다. 나아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집단의 악함을 질타한다. 악한 인간들이 만드는 미친 세상을 조롱한 것이다.
현대 한국사회가 이 조롱을 받아야 마땅하다. 이 소설에 이 시대를 향한 준엄한 꾸짖음이 숨어있다. 거칠게 교훈을 정리해 본다. 첫째로 잘못된 선택의 약함이다. 농부라면 배나무와 사과나무 묘목을 구별해야 하는데 구별하지 못했다. 이것이 마을 사람들 실수였고 약함이었다. 오늘날 지도자들이나 국민이 범하는 선택의 문제다. 지금도 잘못된 선택이 반복되고 있다.
둘째로 실수를 인정하지 못하는 오만이다. 이것은 잘못된 선택보다 더 큰 문제다. 자신들의 고집과 악함 때문에 집단이 거짓말을 한다. 고집과 교만 때문에 뻔히 사과를 따면서도 배나무라고 우기는 미친 마을이 되었다. 오늘날 진영논리에 갇힌 정계와 열렬한 지지자들의 모습이다. 너도 나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수 있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인격이요 지도력이다.
셋째로 잘못된 나무를 뽑는 정직함이 해결책이다. 정직함을 상실한 사회가 걱정스럽다. 아무리 우겨도 사과나무는 사과를 맺고, 동네 사람이 아무리 합의해도 사과는 배가 될 수 없다. 죄와 잘못을 인정하고 돌이켜 회개해야 한다. 성경은 “회개하라”고 거듭 가르친다. 처절한 자성과 가슴 치는 회개가 우리 모두의 살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