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z & Law] 다툼의 여지와 합리적인 의심
김해원
변호사
최근 들어 한국 법조계가 미국법 용어들을 다수 번역 수입(?)하면서 이해하기 힘든 법률용어들을 양산하고 있다. 이에 한국의 추세에 영향을 받은 필자의 클라이언트들도 이런 용어들에 익숙해 져서 필자와의 대화에 많이 인용한다.
그 대표적인 용어로 ‘다툼의 여지’와 ‘합리적인 의심’이 있다. ‘다툼의 여지’는 영어의 ‘논쟁의 여지’(disputable)를 번역한 것 같다. 그러나 ‘다툼의 여지’라고 하면 마치 싸움을 할 여지가 있다고 해석될 수 있서 좀 어색하다.
지난 9월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배우 유아인의 구속영장이 모두 기각된 사유 중 하나가 ‘다툼의 여지’다. 잘못 들으면 검찰과 다툴 수 있는 여지가 있으면 구속영장이 발부될 수 없다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구속영장을 기각한 사유 중 하나에 대해 영장발부 판사는 이 대표의 대북송금 의혹에 대해선 “이 대표가 알았는지, 공모하거나 관여했는지 다툼의 여지가 있다”고 적었다.
또한, 마약을 상습 투약한 혐의를 받은 유아인의 구속영장에 대해 영장전담 판사는 지난 9월 21일 증거인멸 교사 부분에 있어서 다툼의 여지가 있어서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그 이유는 유씨가 동종범죄 전력이 없고 주거가 일정한 점 등을 고려해 이같이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미국의 약식판결(Summary Judgment)을 신청한 경우 판사는 실질적 사실에 대해 다툼의 여지(genuine dispute as to any material fact)가 없는 경우에만 소송을 종결한다.
‘합리적 의심’이란 불특정한 의심이 아닌 구체적이고 명확한 사실에 기반한 의심을 가리킨다. 직감이 아닌 구체적인 사실, 그리고 그 사실로부터의 합리적 추론과 함께 취해진 의심이 있으면 타인을 합리적으로 의심할 수 있다. 명백한 증거는 없지만 어떤 잘못이 있다고 추측할 때 이 표현을 사용하는 듯 한데, 영어로는 reasonable doubt에 가깝다.
한국의 형사소송법 제307조에는 “범죄 사실의 인정은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의 증명에 이르러야 한다”는 구절이 있다. 이렇게 ‘미란다 원칙’처럼 미국의 법 용어들을 아무런 고민 없이 무조건 수입해서 한국의 법 상황에 뜯어 맞추면 적용이 되는 지 합리적으로 의심스럽다.
이렇게 족보도 없는 번역된 용어들이 난무하다 보니 한국에서 최근 맞춤법에 안 맞는 해프닝들이 발생한다.
조국 전 법부무 장관은 지난 5일 광주의 국립 5·18민주묘지를 참배했다. 그런데 서울법대 교수까지 역임했던 조 전 장관은 방명록에 ‘5·18 정신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한 걸음을 내딛겠습니다. 고히 잠드소서’ 라고 적었다. ‘고이’ 를 ‘고히’로 잘못 적은 것이다.
한편, 지난해 5월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최강욱, 김남국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법인인 ‘한국 3M’을 한 후보자의 딸 ‘한xx’로 착각하거나 한 후보자의 딸이 있지도 않은 이모와 2021년 논문을 공저했냐고 질문했다. 이모 교수를 이모로 말한 것이다.
미국에서 오래 산 한인들의 고민은 영어도 잘 안 되고 잘 알던 한국어도 옛날처럼 유창하지 않다는 점이다. 한국처럼 늘 맞춤법을 따라서 한국어를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한국어도 어눌해 진다. 그래서 필자가 법에 대해 설명할 때 한국어로 해도 영어로 해도 클라이언트들은 어려워한다. 그런데, 법률용어는 어차피 영어 네이티브 스피커들에게 말해도 어려워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의뢰인들을 안심시킨다. 어떻게 법적 메시지를 가장 효율성 있게 전달하는 것이 늘 필자의 고민이다. 문의 (213) 387-13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