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검은 호랑이의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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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칼럼] 검은 호랑이의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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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검은 호랑이, 흑호(黑虎)의 해다. 자연계에 실제로 흑호가 살고 있을까? 어느 아마추어 사진작가가 인도에서 흑호를 촬영했다지만, 동물학자들의 의견은 부정적이다. 아직까지는 야생에서 검은 호랑이가 발견된 사례가 없고, 다만 동물원의 어미 백호에게서 가끔 흑호가 태어난다고 한다.  


생물학자들은 흑호가 별개의 종(種)이나 지역적으로 분포된 아종(亞種)이 아니라, 백호 암‧수컷의 열성유전자끼리 만난 변이종이라고 본다. 백호의 개체수가 줄어들면서 근친교배로 드물게 나타나는 사례인데, 멜라닌색소의 영향으로 검정색 줄무늬가 지나치게 표출된 유전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흑호의 마릿수가 매우 적은 탓에 밀렵꾼들의 사냥감이 된다는데, 흑호의 뼈·피부·수염이 사람의 몸에 좋은 약재가 된다는 소문 때문에 중국이나 중동의 졸부들에게 비싼 값에 팔린다고 한다. 


오래 전 백두산 여행길에 옛 고구려 영토인 중국 길림성 집안(集安)시에 들른 적이 있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겠지만, 그때는 고구려 고분(古墳) 안에 들어가 수천 년 전의 벽화를 직접 대할 수 있었다. 유명한 청룡·백호·주작·현무(靑龍·白虎·朱雀·玄武)가 또렷한 빛깔로 눈앞에 다가왔다. 네 방위신(方位神) 중 현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백호뿐이고, 나머지는 공상적이거나 비현실적인 모습의 동물들이다. 예로부터 백호를 상서로운 영물(靈物)로 여겨온 백의민족 우리 겨레는 백호가 잡귀를 몰아내는 벽사(僻邪)의 힘을 지닌다고 믿었다. 


백호 어미에게서 검은 호랑이가 태어나면 상서로운 일일까, 불길한 징조일까? 흑호의 해에 우리는 제20대 대통령을 선출한다. 우성(優性)인 백호가 아니라 하필이면 열성(劣性)인 흑호의 해라니, 가슴이 뜨악해진다. 대통령후보로 나선 이들의 면면에서 상서로운 백호의 기상을 만나기 어렵다. 어미가 백호라면, 벽사의 영물인 백호가 태어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주권자인 국민도 그럴 것이다. 사악한 정치 잡귀들, 윤리를 짓밟고 정의를 깔아뭉개는 권력의 잡배들을 쓸어버릴 경륜가, 흰 호랑이처럼 삶이 깨끗하고 인격이 맑은 정직한 대통령이 기다려진다. 이 기다림은 실망으로 끝날 모양이다. 딱히 백호처럼 희망을 주는 후보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실망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절망이다. 이 후보에게 투표하면 실망이 기다릴까 걱정되고, 저 후보에게 투표하면 절망에 빠져들까 두렵다. 특정후보의 열렬한 지지자들 말고는 대체로 그 실망과 절망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우성유전자는 일찍 나타나고 열성유전자는 잠재되어 있거나 늦게 나타날 뿐, 그것이 생물학적 가치의 우열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흑호는 백호의 몸 안에 잠재되어 있던 유전자가 뒤늦게 나타난 희귀 변이종일 뿐, 결코 열등한 생명체가 아니다. 열성유전자를 받았어도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당한 생명체다. 흑호는 벵골호랑이보다 몸집이 작지만 행동이 매우 민첩하고 영리한 것이 특징이다. 백호가 아닌 바에야 부정·부패·비리의 척결에 민첩한 흑호 같은 대통령을 낳아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과 가족의 불법을 교묘히 감추는 역겨운 위선자들, 막중한 나랏일을 정치선전의 도구로 써먹는 얄팍한 포퓰리즘, 서민을 위한다면서 서민의 등골을 빼먹는 수상쩍은 개발사업, 영세민과 자영업자들을 절망의 벼랑으로 내모는 기만적 경제운용, ‘그분’의 눈치를 살피며 자기 보신에 급급한 엉터리 사법관…, 저 추악한 잡귀들을 깡그리 몰아낼 검은 호랑이 말이다. 


기대에 못 미치는 대통령후보들 때문에 실망하거나 절망하는 것이 아니다. 속는 줄도 모른 채 거짓 선동에 휘둘려 무턱대고 손뼉을 처대는, 저 참을 수 없는 박수의 가벼움에 실망하고 그 사려 없는 선택에 절망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실망과 절망 사이에서 마냥 방황할 수는 없다. 흑호처럼 영리하고 민첩한 젊은 유권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지 않은가! 그 신선한 젊음의 선택이 흑호 해의 소망을 낳으리라. 실망과 절망 사이, 그 암울한 자리에서 젊음의 소망이 꿈틀거린다. 괴테의 말처럼, 인간이 절망하는 곳에서는 신(神)이라도 살 수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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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칼럼니스트: 변호사로 현재 숙명여대 석좌교수로 있다. 경기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서울중앙법원장 등 법관으로 근무하던 30년 동안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문학, 철학 등 인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현재는 PEN International, Korea 회원으로서 인권위원장을,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서 문인권익옹호위원장을, 학교법인 이화학당 이사를, Seoul National Symphony Orchestra에서 명예지휘자를, FEBC(극동방송)에서 신앙 칼럼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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