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10월이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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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칼럼] 10월이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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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 근 

변호사 / 숙명여대 석좌교수


 

10월의 끝자락을 밀어내며 가을이 깊어간다. 산과 숲의 꽃나무들은 찬란한 단풍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적갈색의 어두운 잎들을 땅에 떨어뜨린다. 10월이 가면, 아름다움도 사위어간다. 그렇지만 사위고 잃어버리는 것은 또한 익어가는 것이다. 잃는 것이 없으면 익는 것도 없다.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은 새로운 무언가를 향해 익어가고 성숙해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니체는 외쳤을 게다. ‘가을은 자연의 계절이 아니라 영혼의 계절’이라고. 


땅에 떨어져 썩어지고 거름이 되는 늦가을 낙엽은 그 영혼의 성육신이다. 누렇게 변색되어 땅으로 떨어지는 나뭇잎 속에서 새 생명을 잉태한 한겨울의 산고(産苦)가 기다린다. 정열의 여름은 바쁘게 달려가는 무리의 계절, 가을은 잠잠히 기다리는 고독한 영혼의 계절이다. 달리는 것이 성장이라면, 기다리는 것은 성숙이다. 성숙 없는 성장은 속절없이 나이만 먹은 미숙아나 다름없다. 


봄에 뿌린 씨앗이 금방 수확의 결실로 이어지지 않는다. 비바람과 뙤약볕, 가뭄과 태풍의 시련을 견뎌낸 오랜 기다림 끝에야 가을의 들녘은 비로소 풍성해지고, 추수를 마친 들녘 또한 적막한 고독 속에서 겨울을 맞이하며 새봄을 기다린다. 기다림은 자연 앞에 겸손한 성찰의 눈길, 하늘의 섭리를 신뢰하는 소망의 몸짓이다. 기다림은 대상이 오는 길목에 서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기다림은 대상을 향해 스스로 다가가는 것이다. 대상에게로 다가가는 사람은 그 기다림 속에서 이미 대상과의 만남을 누리고 있다. 언어 이전에 침묵이 있다. 침묵은 언어의 고향이다. 늦가을의 침묵은 새봄의 언어에게로 다가가는 기다림이다. 


낙엽이 흩날리지 않는 가을 길녘은 마냥 허전하다. 낙엽은 얼마쯤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 그래서 아침에 피었다가 떨어진 꽃잎을 곧바로 쓸어내지 않고 온 종일 기다렸다 해가 지는 저녁에야 쓸어낸다(魯迅, 朝花夕拾). 생기 있고 화려했던 한낮과 쇠락해가는 저녁 사이에 놓인 갈등을 두루 껴안아 온 하루의 값진 의미를 캐내는 황혼녘의 성찰이 묵직이 다가온다. “인간은 사회에서 사물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감(靈感)을 얻는 것은 고독 속에서만 가능하다.” 괴테의 깨달음이다. 고독한 영혼은 가장 높은 곳에 홀로 둥지를 틀고 하늘 높이 솟구쳐오르는 독수리처럼 외롭지만 고고(孤高)하다. 


​추석 무렵의 이른 가을, 많은 이들이 산을 넘고 들을 건너 제 고향을 찾았다. 조상의 무덤 앞에 엎드리면 누구나 경건한 고독에 잠긴다.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김현승, 가을의 기도) 치열하도록 고독한 무덤 앞에 엎드려 삶과 죽음의 의미를 성찰했을 터이다. 아울러, 아직도 탐욕의 굴레를 벗지 못한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마음 아파했을 것이다. 모질고 각박했던 언행들, 종내 내려놓지 못한 자기애, 그 덧없는 욕망을…. ​


가을의 고독은 신이 내린 더없는 은총, 자연이 베푸는 최고의 선물이다. 계절의 모퉁이를 휘돌아 나온 가을바람만큼 영혼의 더듬이를 곤두세우는 경건함도 다시 없다. 10월이 가면, 나무들은 잎을 떨어뜨려 땅을 기름지게 하고 거기서 또 다른 생명들이 살아갈 터전을 일궈낸다. 


가을 숲은 성소(聖所)다. 고독한 명상이 살아 숨 쉬는 곳, 싱그런 생명의 숨결이 웅크려 있는 대지, 정결하고 거룩한 자리다. 세상의 온갖 시끄러운 소리가 범접할 수 없는 곳, 갈가리 찢긴 마음 끌어안고 홀로 들어서야 하는 고해실, 신성하고 고독한 공간이다. ​


10월이 가면, 우리 모두에게 영혼의 계절이 더욱 깊어지기를 소망한다. 특히 나랏일을 맡은 정치인들이 그 천박한 욕망을, 모질고 각박한 언행을 뉘우치고 돌이키는 성숙한 가을이 되기를 바란다. 보수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우파, 진보의 가치를 조롱하는 좌파가 더는 보혁(保革)의 소중한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 없기를…. 아무에게서나 아무 것이나 덥석 받아 챙기는 탐욕의 손길, 거짓으로 정의를 비웃고 사악한 술수로 선악을 뒤집는 권력욕의 무리를 저물어가는 늦가을 서릿바람이 휘몰아쳐 말끔히 쓸어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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