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한 번 더 경험하고 싶은 나라
주술 논란, 반려동물 지지까지 등장했던 혼탁한 선거전 끝에 제20대 대통령이 선출되어 취임을 앞두고 있다. 이제는 비방과 대결을 그치고 국가 발전을 향해 모두 함께 달려가야 한다. 대통령 당선인은 본인과 가족에게 제기된 몇몇 의혹들을 그대로 안은 채 선출되었다. 그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 집권 후 자신의 허물을 망각한 탓에 실패한 대통령이 얼마나 많았던가?
현 정권은 퇴임 이후가 걱정되었는지 전례 없는 돌연변이 사정(司正)기구를 만드는가 하면, 검찰의 수사기능을 무력화하고 비판의 입을 틀어막는 갖가지 수단들을 고안했지만, 과연 그것으로 임기 중의 과오들을 모두 덮을 수 있을까? 대통령은 국민 앞에 늘 겸손, 정직해야 한다.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부정부패를 척결할 수많은 방책을 품고 있어도, 권력 주변의 삶이 건전하지 못하다면 지도자의 자격을 인정받기 어렵다.
역사와 국민 앞에 거짓이 없는지, 겉으로는 개혁을 내세우면서 안으로는 수구(守舊)의 껍질 속에 틀어박혀 있지 않은지, 입으로는 정의를 외치면서 손발은 적폐의 유혹에 이끌리는 것은 아닌지, ‘나는 늘 옳고 너는 항상 그르다’는 오만으로 국민통합을 깨뜨리고 있지 않은지, 경제와 안보에 몰아닥친 먹구름을 장밋빛 말잔치로 덮어 진실을 감추려 하지 않는지… 정직하게 돌아보지 않으면 새 정부의 앞날도 어두울 수밖에 없다.
국가권력은 합법적으로 인정된 유일한 강제력이다. 이 강제력이 폭력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대통령의 신념윤리와 책임윤리가 필수적이다. ‘소명(召命)의 정치’를 역설한 막스 베버는 통치자가 지녀야할 자질로 신념에 대한 열정, 투철한 책임의식, 균형적 판단력을 제시했다. 대중의 일시적 인기에 집착하면 신념의 열정도, 책임의 사명감도 폭력적 정권욕으로 추락하기 일쑤다.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신념윤리는 포퓰리즘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만큼 냉철해야 하고, 국민통합을 위한 책임윤리는 반대세력에 대한 적개심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이성적이어야 한다. 그 냉철한 이성이 지도자에게 필요한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의 바탕이다.
신임 대통령에게 무엇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이념․세대․지역․성별․계층으로 갈가리 찢긴 한국사회를 화합의 한마당으로 모아들이는 균형적 판단력이다.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에서 골 깊은 내부 분열까지 떠안은 채로는 나라를 통합의 운명공동체로 이끌어갈 수 없다. 좌우를 아우르는 탕평과 쇄신에 모든 역량을 쏟아야 한다. 자신의 정치신념을 도그마처럼 우상화하지 않고, 이념의 양극단을 벗어나 변증법적 통합을 추구하는 것이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구현하는 균형의 리더십이다.
오늘 이 나라에 닥친 혼란과 시련은 모두가 눈앞의 이익을 위해 양심을 저버리고 순리를 거스르는 타락한 윤리의식에서 비롯되었다. 교조적 이념, 극단적 이데올로기보다 더 위험한 것은 ‘도덕 부재’를 넘어 ‘도덕 파괴’에까지 이른 윤리상실의 시대상황이다. 정치윤리․공직윤리는 물론 기업윤리와 법조윤리 심지어 종교계의 신앙윤리마저 허물어지는 카오스의 시절… 이 시대의 최우선 과제는 국가지도층의 도덕성 회복이다. 그 도덕성이 신임 대통령의 첫 인사에서부터 증명될 수 있기 바란다. 노회(老獪)하고 부도덕한 정치꾼이나 이너서클의 예스맨들을 권력의 문고리로 둘러 세우는가, 네 편 내 편 가리지 않고 청렴하고 유능한 전문가를 널리 들어 쓰는가? 새 정부의 첫 인사는 정권의 성공 여부를 가름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이전은 선거공약을 지키기 위해 ‘바른 터’를 찾으려는 결단일 수 있지만, 공론화 과정 없이 홀로 뛰듯 성급하게 밀어붙이는 모양새는 바르게 보이지 않는다. 모든 공약을 신속히 이뤄내겠다는 의욕 과잉은 자칫 졸속과 독선으로 흐르기 십상이라는 것이 역대 대통령들이 남긴 실패의 교훈이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던 현 정부의 공약은 ‘한 번도 경험해선 안 될 나라’의 공약(空約)이 되어버렸다. 새 집무실과 함께 새 대통령직이 ‘한 번 더 경험하고 싶은 나라’를 만들어가는 바른 터가 되기를 기대한다.
이우근 칼럼니스트: 변호사로 현재 숙명여대 석좌교수로 있다. 경기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서울중앙법원장 등 법관으로 근무하던 30년 동안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문학, 철학 등 인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현재는 PEN International, Korea 회원으로서 인권위원장을,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서 문인권익옹호위원장을, 학교법인 이화학당 이사를, Seoul National Symphony Orchestra에서 명예지휘자를, FEBC(극동방송)에서 신앙 칼럼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