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토끼와 프로메테우스
이 우 근
변호사 / 숙명여대 석좌교수
예언자는 불행하다. 불길한 앞날의 예언에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조선통신사 두 사람의 보고가 서로 달랐다. 정사 황윤길은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라 했고, 부사 김성일은 침략의 낌새를 보지 못했다고 전했다.
동인이 지배하던 조정은 동인 김성일의 보고를 채택했다. 얼마 뒤, 조총으로 무장한 20만 왜군이 조선 해안에 상륙한다. 임진왜란이다.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와 제사장 라오콘은 그리스의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지만,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목마를 안으로 들인 트로이는 결국 함락된다.
앞일을 미리(pro) 보는(metheus) 프로메테우스는 최고신 제우스에게 장차 닥칠 일을 알려주지 않았다. 제우스의 눈 밖에 난 프로메테우스는 사람을 만들고, 인간세계를 창조했다. 그리고 제우스의 번개에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준다. 휴머니즘의 탄생이다.
불로 어둠을 밝히고 무기와 농기구를 만들어 놀라운 문명을 이룩한 인간은 오만해진 나머지 신들을 우습게 여기기 시작했다. 화가 난 제우스는 인간을 만든 프로메테우스를 코카서스 산꼭대기에 묶어두고 독수리로 그의 간을 쪼아 먹게 한다.
한낮에 독수리에게 쪼인 프로메테우스의 간은 밤중에 다시 돋아나고, 다음날 독수리가 또다시 그의 간을 파먹는다. 끝없는 고통이다.
그렇지만 프로메테우스는 굴복하지 않는다. 그의 저항의식은 간처럼 새롭게 돋아나곤 했다. 그는 억압과 불의에 맞서는 저항의 상징, 휴머니즘의 등불이 되었다.
간은 프로메테우스에게 불멸의 저항정신이고 자유의 씨알 곧 인간성의 본질이다. 저항에는 두려움이 따르지만, 그 두려움에 맞서는 것이 진정한 용기다.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들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윤동주 ‘간’ 일부)
독수리에게 끝없이 쪼아 먹히고 다시 돋아나는 프로메테우스의 간에서 시인은 수난의 민족, 그 꺾이지 않는 저항정신을 보았던가. 한반도와 모양이 닮은 토끼가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지킨다는 발상이 이채롭다.
우리 전래의 <구토지설>과 그리스신화가 윤동주의 ‘간’에서 하나로 만난다. 산소 측정장치가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 잠수함에 토끼를 태웠다고 한다. 산소 농도에 민감한 토끼의 예지력을 활용한 것이다. 토끼가 프로메테우스처럼 예언자 구실을 했던 셈이다.
토끼의 간을 노리는 용왕의 흉계를 따돌리고 멀쩡히 살아나오는 토끼의 지혜는 날마다 파먹히고 재생하는 프로메테우스의 간과 어우러져 식민제국주의의 폭력에 저항하는 겨레의 아픔을 위로한다.
포식자의 야만성은 역사에서 늘 패배로 끝장났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도 그렇게 끝장날 것이다. 포식자는 바깥에만 있지 않다. 공동체 안에도 용왕이 웅크리고 있다. 면책특권·불체포특권을 누리는 국회의원의 세비는 1억5500만 원, 세계 최고 수준이다.
각종 활동비, 상여금, 휴가비, 보좌진들의 월급 등을 합하면 의원 1인당 소요액이 연간 7억 원, 300명이면 2천억 원을 훌쩍 넘는다. 모두 토끼 같은 국민의 세금이다. 게다가 따로 수억 원의 후원금까지 받는다. 그런데도 국회의원 숫자를 더 늘리겠다니, 그 파렴치한 도덕 불감증에 소름이 돋는다.
저들이 나라와 국민을 위해 얼마나 소중한 일을 얼마나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지…. 자기들 세비 올리고 표를 낚는 선심예산에만 여야가 뜻을 같이할 뿐, 날마다 싸움판이요 사사건건 권력다툼이다.
한쪽엔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바보들, 다른 쪽엔 간특하고 위선적인 선동꾼들…. 이 두 무리가 서로 치고받으며 정치판을 주무르는 나라는 절망적이다.
저들을 매섭게 꾸짖으며 불행을 경고하는 예언자가 아쉽다. 프로메테우스의 저항정신을 지키는 토끼의 사명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절이다. 토끼는 다름 아닌 주권자, 국민이기에…. 마침 토끼의 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