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퍼펙트 레슨'
김희식
(주)건축사무소 광장 상무
신호대기 중, 읍내 사거리에 눈길을 끄는 현수막이 있습니다. ‘KBS전국노래자랑’ 출연신청 안내광고입니다. 가라오케나 노래방에 갔던 때가 언제였던가 할 만큼 오래된 터에 생뚱맞게 참가의사를 밝힌 데는 나름 이유가 있었습니다. 방학을 맞아 LA가족들이 이곳을 방문하는 주말에 참가일정이 잡혀 있다는 점, 출연한다면 가족들과 즐거운 추억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 그리고 대중문화 장수프로그램에 대한 참가 충동이 작동했습니다.
예심 날, 집합장소인 군민회관 입구 게시판에는 참가자 이름이 가나다 순으로 적혀 있었습니다. 총 115명이 등록했더군요. 데스크에서 본인 확인을 마친 후 ‘참가번호 36번’ 비닐 패찰을 받아 목에 걸고 장내로 들어섰습니다. 500석 규모의 행사장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참가자의 가족, 친지, 직장 동료나 이웃주민들인 듯 합니다.
두 차례의 예심 중 1차 예심을 통과하고 나니 30명만 남았습니다. 곧 이어 2차 예심이 시작됐습니다. 40대 후반에 즐겨 불렀던 이덕진의 ‘내가 아는 한 가지’를 골랐습니다. ‘살아가는 동안/ 한 번도 안 올지 몰라/ 사랑이라는 감정의 물결/ 그런 때가 왔다는 건/ 삶이 가끔 주는 선물/ 지금까지 잘 견뎌왔다는/ 널 만났다는 건~’ 고음 부분에서 너무 힘을 주다보니 이어지는 후렴 첫 소절 가사가 갑자기 안 떠올랐습니다. 결과는 탈락!
최종 출연이 확정된 20명만 남았습니다. 면면을 보니 재미있고 익살스러운 몸짓으로 사람들을 웃기는 사람, 빠른 템포의 트로트를 춤과 함께 부르는 사람, 10년마다 한 번씩 30대부터 50대까지 연거푸 3번째 출연한다는 토박이 장년, 걸그룹을 표방한 소녀들, 흘러간 트로트를 부르는 초등생 등 남녀노소 다양한 재주꾼들이었습니다.
'밋밋하게 노래만 열심히 불러서는 2차 예심 통과가 쉽지 않다'거나 '시청자들에게 웃음과 재미를 선사할 수 있는 끼가 있어야 한다'는 조언을 듣기는 했지만 떨어지고 나니 어쨌든 섭섭했습니다. 특히, 부르기 편하고 귀에 익은 트로트를 택할 걸, 개성 살린답시고 선택한 곡이 결정적으로 내겐 어려운 곡이었나 싶은 셀프평가도 했습니다.
막간에 등장한 초대가수들도 역시 죄다 트로트 가수입니다. 친숙한 트로트를 부르지 않은 아쉬움도 있었죠. 트로트論 전문가 손민정은 “트로트는 단순히 음계, 박자, 가사 형식으로 그 특징을 한정지을 수 없다. 한국인은 트로트를 통해 때로는 저항하고 때로는 타협하며 살아가는 존재의 의미를 찿아 나갔다. 이때의 타협은 순종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선택되는 대안은 여전히 주체의 능동적인 세상읽기가 그 중심이다”(트로트의 정치학, 2009년).
그가 말한 ‘능동적 세상읽기’란 트로트에 녹아있는 대중의 ‘희노애락’을 지칭할 수도 있을 겁니다. 대중음악비평가 서정민갑은 2020년부터 젊은 트로트 가수들이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현상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썼죠. “TV조선 ‘내일은 미스트롯’과 ‘내일은 미스터 트롯’ 방송 이후 송가인과 임영웅을 비롯한 젊은 가수들이 대세가 되었습니다. ‘내일은 미스터 트롯’의 최고 시청률이 35.7%이니 말 다했지요. 트로트는 그만큼 시장을 갖고 있습니다. 다만 그 시장을 자극하고 불 붙일 스타가 없었을 뿐입니다. 물론 중견, 고참 트로트 대표가수들이 여럿 있었지만 시장을 확장하지 못하고 그들만의 리그로 머물러 있을 때,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은 새로운 얼굴과 새로운 방식을 동원해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서바이벌 방식을 결합해 엔터테인먼트 기능을 강화하고, 다른 스타일의 새 얼굴을 보여주니 궁금해지고 재미있어 졌습니다”(누군가에게는 가장 좋은 음악, 2020년).
얼마 전 베이스 연광택은 그의 마스터클래스 워크숍에서 “노래를 잘 하려고 하지 말고 메시지(가사)를 잘 전달하라”라고 말했습니다. 트로트의 왕자로 등극한 임영웅도 자연스럽게, 듣는 이들 편하게 트로트를 부르면서 많은 광팬층을 형성한 게 아닐까요. 턱없는 노래실력에 너무 힘주어 잘 부르려다, 2차 예심에서 탈락한 이번 체험에서 늦게나마 터득한 것이 있습니다. ‘너무 노래 잘 부르려 하지마라. 자신감 있게 부르되 힘빼고 자연스럽게 불러야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