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취임사와 귀거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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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칼럼] 취임사와 귀거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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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숙명여대 석좌교수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의 집무실 책상 위에는 ‘책임은 여기서 멈춘다’라는 명패가 놓여있었다고 한다. 모든 정책 결정에 대통령 자신이 최종적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 정책 실패의 책임을 아랫사람에게 떠넘기거나 불리한 일에는 아예 입을 닫아버리는 대통령은 책임윤리가 결핍된 비겁한 지도자다. 지도자의 으뜸가는 덕목은 신뢰의 인격이다. 무책임한 대통령을 관료들이 신뢰할 턱이 없다. 국민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힘 있는 누군가의 자식들처럼 자기소개서에 써넣을 가짜 스펙일랑 꿈도 꾸지 못하는 서민의 아들딸들은 오늘도 고된 경쟁에 내몰려있고, 냉혹한 취업전선에서 줄곧 패자부활전을 치러야하는 청년들은 붙잡을 연줄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른다. 어린 자녀를 키우다 어느새 퇴직을 눈앞에 둔 중장년층은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해 가족의 생계 걱정으로 가슴에 피멍이 든다. 


사회적·경제적 울타리를 잃고 단기 임시직 일자리라도 찾아나서야 하는 노년세대는 그저 아들딸 손주들만이라도 큰 탈 없이 살아내기를 바랄 뿐이다. 그 이상의 어르신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네들의 가슴에서 사라진 소망의 불씨를 무엇으로 다시 살려낼 것인가? 권력과 이권 다툼에 골몰하는 정치꾼들에게는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다. 희망 잃고 가슴 시린 민초들만 애처로울 따름이다. 


촛불시위 덕분에 등장한 정권이 거대한 산불피해를 남긴 채 초라히 막을 내렸다. ‘평등·공정·정의’의 구호로 출발했다가 ‘불평등·불공정·불의’라는 종착지에 다다른 모습과 꼭 닮았다. 탈원전, 소득주도성장은 말할 것도 없고 권력실세 일가족의 기이한 범죄의혹, 27번이나 뒤바뀐 부동산정책, 울산지방선거 부정의혹 등 어느 것 하나도 잘못을 뉘우치거나 바로잡으려 하지 않았다. 일그러진 신념을 앞세워 옳고 그름을 뒤집는가하면, 포퓰리즘과 팬덤정치·이벤트정치로 국정을 그르쳤다. 검찰수사로 앞 정권을 낱낱이 까발리더니, 누구의 무슨 사건에 대한 수사가 걱정되었는지 다수의석을 동원해 검찰수사권을 빼앗는 법까지 만들었다. 오죽하면 피의자·피고인들이 검찰과 사법부를 개혁하겠다고 큰소리치는 세상이 되었을까? 


국민통합의 공약은 국민 갈라치기의 실체를 드러냈고, 자기편끼리의 자리 나누기는 모든 공직 인사에서 철칙처럼 굳어졌다. 그래서일까? ‘우리 총장님’을 ‘우리 대통령님’으로 바꿔 불러야하는 기막힌 역전극을 맞게 되었다. 남의 일로만 여길 것인가? 어림없다. 새 정부에 둘도 없는 반면교사로 삼아야한다. 검찰 출신 관료와 정치인들이 새 정권에서 또 다른 ‘자기편끼리’로 변신하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스멀거리기 때문이다. 


신임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자유를 힘주어 강조한 대목에는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다만, 자유의 길에 흘려야할 피와 땀과 눈물의 각오가 선명하지 않고 사회통합과 갈등해소를 위한 구체적 비전이 미흡했던 점은 퍽 아쉽다. 그렇더라도 합리적 지성에 역점을 두고 미사여구 없이 검박하게 첫 의지를 담아낸 점에서 대체로 수긍할 만한 취임사였다. 


취임사는 취임식 날 하루를 위한 1회용 말잔치가 아니다. 5년 임기 내내 대통령 마음에 뿌리박아 그 발걸음을 이끌어갈 국정의 이정표다. 대통령은 취임식 날 하루만이 아니라,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취임사를 거듭해서 정독하기 바란다. 어떤 비선실세의 솔깃한 건의에도 취임사로 국민 앞에 다짐한 결의를 꺾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취임 때의 공약을 공중의 연기처럼 날려버린 전임자들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취임사에 담긴 약속의 이행 여부를 국민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다. 


도연명의 <귀거래사>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오로지 자연의 섭리에 따라 돌아가니, 즐겨 천명을 따를 뿐 무엇을 의심하고 망설이랴.(聊乘化以歸盡 樂夫天命復奚疑)” 민주국가에서 천명은 곧 민심이다. 신임 대통령도 취임사의 약속을 굳게 지키는 신뢰의 인격으로 민심을 즐겨 따르다가, 임기를 마친 뒤에 아무 의심 없이 자연인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또 다른 자유의 길을 어떤 망설임도 없이 걸어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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