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주권과 책임
이 우 근
변호사 / 숙명여대 석좌교수
주권은 나라의 최고 권력이다. 헌법은 대한민국의 주권자가 국민이라고 선언한다. 주권은 헌법상 최고 권력이지만, 헌법에서 비로소 부여된 것은 아니다. 그 헌법을 국민이 제정하기 때문이다. 주권은 실정법인 헌법보다 앞서는 자연법적 권력이다. 모든 권력에는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 주권에도 그에 대응하는 책임과 의무가 따르기 마련이다. 주권은 헌법에 선행하지만, 주권자인 국민도 헌법을 지키고 따라야 할 법적 책임을 짊어진다. 주권은 무소불위의 초법적 권리가 아니다. 국민 스스로 만든 헌법을 국민 스스로 따르는 ‘주권의 자제와 자기구속’, 이것이 헌법을 제정한 주권자의 책임이다.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라는 책을 쓴 레비츠키와 지블랫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은 헌법이나 실정법이 아니라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의 규범’이라고 해석한다. 상호관용은 자기와 다른 의견을 인정‧수용하는 열린 자세를 뜻하고, 제도적 자제는 실정법적 권리를 신중하게 행사하는 분별력 있는 태도를 가리킨다. 자제와 관용이 없는 극단주의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국민은 국가의사를 결정하는 주권자이지만, 생각과 신념이 제각기 다른 다수의 국민이 어떻게 단일한 국가의사를 결정할 수 있는가? 결국 다수결원칙에 따를 수밖에 없는데, 나라의 모든 일을 국민 모두가 투표에 참여해서 결정하는 직접민주주의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국민은 각 개인이 주권자이지만, 각 개인이 국가의사의 최종 결정권자는 아니다. 현대 국가들은 국민의 대의기관인 의회를 통해 국민주권을 현실화한다. 국회도 국민과 마찬가지로 ‘헌법을 나라의 최고규범으로 받들고 지키는 자기구속의 의무,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의 규범적 책임’을 부담한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국회는 정치꾼들의 전쟁터로 전락한 지 이미 오래다. 상호관용도 제도적 자제도 모두 내팽개친 채 오로지 증오‧저주‧적개심으로 똘똘 뭉친 정당과 정치인들이 나라와 국민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권력을 독차지하려는 술수와 정략으로 극한 대결을 벌이는 중이다. 국민 또한 저들에 대한 지지파와 반대파로 갈라져 권력중독자들의 손에 선동의 도구처럼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22대 국회에 무소속 국회의원이 단 한 명도 없다. 정당이나 정파에 소속되지 못하면 정치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기 때문 아닌가? 대화와 타협의 정치는 사라지고 경제와 규제의 개혁은 실종된 채, 흔치 않아야 할 탄핵‧특검 주장과 고소‧고발만 일상사처럼 넘쳐난다.
탄핵‧특검과 고소‧고발을 다루는 사법영역은 온전한가? 아닐 게다. 정치는 법에 떠넘기고, 법은 정치의 눈치를 살핀다. ‘법원에 내맡긴 정치, 정치권의 낌새를 헤아리는 사법’이 삼권분립의 모습이라면 정녕 주권자와 헌법이 바라는 민주주의는 아닐 것이다. 이런 엉터리 민주주의가 어떻게 가능한가? 주권자인 국민의 투표로 가능해졌다. 관용과 자제를 저버린 유권자들이 관용과 자제를 내팽개친 저 엉터리 정당들과 권력욕에 사로잡힌 정치꾼들을 국회와 제도정치권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공화(共和)는 ‘다름’에 대한 관용과 자제가 필수적이고, 관용과 자제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이성적 분별력’에서 나온다. 주권자인 국민이 정치꾼들의 선동에 휘둘리고 선심 공세에 눈멀어 이성과 분별력을 잃어버리면 민주주의는 끝장이다. “민주주의는 총부리보다 투표함에서 더 빈번히 죽는다.” 미국 역사학자 헤더 리처드슨의 통찰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경고했다. “민주주의가 타락하면 우민(愚民)정치가 된다." 물극필반(物極必反)… 관용과 자제를 내버리고 제 욕심껏 극단으로 치달으면 반드시 극단의 실패에 이르게 되는 것이 세상살이의 이치다.
처칠의 탄식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민주주의는 지금까지 시도된 다른 통치체제를 제외하면 최악의 통치체제다.” 주권자인 국민이 가짜 민주주의자들의 선동에 중독되어 가짜 민주주의의 독성에 무감각해지는 최악의 정치체제로 타락하지 않을까 두렵다. 굳이 다른 정치체제를 제외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 최악의 정치체제를 최선의 정치체제로 만드는 것이 주권자인 국민의 책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