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영수의 코미디 40년 연예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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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영수의 코미디 40년 연예비사<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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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래-임미숙 결혼식 사회를 보는 모습, 왼쪽은 동료 코미디언 이경래, 오른쪽은 김정식. 김-임 커플의 결혼식. 고생 끝에 대박난 중식당 '린찐'을 배경으로 김학래 임미숙 부부가 포즈를 취했다. KBS 고전 명랑극장 출연 당시 임미숙씨와 함께.(위에서부터) 


神(신)군부의 도움


#.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지만 코미디 공부를 한 적은 없다. 연기학원을 다닌 적도 없고 연극반에 들어간 적도 없다. 막연히 코미디를 좋아했고 어린시절 동네에 가설극장이 들어오면 코미디 영화를 자주 보았고 학교모임에서 학생들을 웃긴 게 코미디 실력의 전부다. 

 그런 주제에 방송출연하는 개그맨이 되려고 1981년 제1회 MBC개그맨 콘테스트에 지원서를 냈다는 것은 양심에 찔리는 짓이었다. 시골 부모님이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여행을 떠나야 하는데 집에서 기르는 돼지 두 마리, 개 한마리, 고양이 한 마리, 닭 스무마리에게 밥 줄 사람이 없다고 나를 호출했다. 부모님은 대학생은 학교를 아무 때나 제맘대로 다니는 줄 알았다. 맞긴 맞았다. 축제 중이어서 수업이 없었다. 우물가를 다니면서 뜸물을 받아다가 돼지를 먹이고 반려동물들을 관리했다. 하루는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는데 흑백TV에 “MBC는 유능한 개그맨을 선발합니다” 라는 광고가 떴다.


#. 동네 이발소 주인이 “자네 말 잘하지. 저기 한 번 나가보지 그래”라고 말했다. 대꾸를 안했더니 “시골서만 잘하면 뭐 해 저런대서 해야지”라고 했다. 그래도 듣고만 있었다. “자네 형이 더 잘하지. 형한테 나가라고 할까?” 시골은 이렇다. 남의 집 속사정을 다 안다. “에이, 관둬 관둬. 어중이 떠중이 다 나갈 일은 아니잖어, 그치?” 할말이 없었다. 기분이 나빴으나 화면을 유심히 봤고, 모집내용을 숙지했다. 이발사가 머리나 깎지 왜 우리 집안 전체를 깎아내리나? 개무시를 당하자 이발사에게 화풀이를 하고 싶었다. 바로 원고를 써서 방송국에 보냈는데 합격했으니, 2차 실기시험을 치러오라고 한다. 순전히 화난 김에 뭘 저질렀다. 인생은 계획해서 되는 일도 있겠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순식간에 이뤄지기도 한다. 그냥 줍는 거다. 하여튼 저지르고 볼 일이다. 개그에 소질이 있고 원고를 잘 써서 합격했을 거라고 자신만만 했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지원자들의 원고심사를 특채로 개그맨이 돼서 활약하고 있던 김학래 개그맨이 담당했는데, 내 서류를 보니 출신대학교가 같았고 나이도 비슷해 유심히 신경을 써서 살펴봤고 원고내용이 독특했다고 상황을 전했다.  


#. 그도 그럴 것이 지원자들은 연예인 흉내내기가 거의 다였고, 그중에서도 절반 이상이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으로 국민스타가 된 이주일 열풍에 영향을 받아 이주일의 성대모사, 춤, 슈지큐 노래, 더듬는 말투, 바보연기로 일관했는데,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일단 나의 소재는 대상이 앵커 정치인 봉두완, 무장공비 귀순용사 김신조 목사, 국보 국문학자 양주동 박사, 인기 아나운서 MBC 오남열, TBC 박종세 등으로 그 누구도 시도해 보지 않았고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의 성대모사이면서 내용이 상당히 정치풍자적인 것이여서 과연 아마추어가 이것을 정말 할 수 있는 사람일까 의심이 들기도 했다는 것이다. 확연히 다른 상품을 들고 나갔기 때문에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학교 선후배 관계에 있으면 우리나라에서는 일가친척이나 다름없는 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부정이 있었거나 특혜를 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것, 김학래 하면 현재 사업으로 가정적으로 인기로 성공한 개그맨일진대 누가 감히 선수임을 부인할 수가 있겠는가.


#. 선수이기 때문에 선수를 알아봤다고나 할까? 어느 땐가 지원서 경력란에 정당·정치운동이나 학생운동했던 전력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게 좋다고 귀띔까지 해주기도 했다. 만약 그때 그시절에 시골에 가지 않았으면 이발소에서 TV를 못봤으면, 주인의 빈정거림이 없었으면 김학래 개그맨이 심사를 하지 않았으면, 영영 개그맨이 될 수 없었을 거란 생각도 든다. 개그맨이 되는데는 여러 장벽이 있었는데 이런 것도 있다. 살벌했던 1981년도 당시 정치상황에서 신군부는 국민에게 인기를 끌려고 구인광고에서 학력·나이 제한을 철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옛날 같으면 방송국 광고는 24세 미만(용모단정하고 품행이 방정한)이었겠는데 29세 늦깎이로 데뷔할수 있는 길이 트였던 것이다. 아예 지원서조차 내지 못할 것을 극복하게 됐다. 엄영수 정말 하늘이 돕는 인간이다. 아니 신군부가 도왔다.


#. 김학래 임미숙 개그맨 1호 커플의 결혼식 사회를 맡게 됐다. 코미디팬들의 최고의 관심사인 이 행사의 사회를 보고 싶은 사람은 많았을 것이다. 귀중한 자리를 내게 맡겨준 김학래-임미숙 커플에게 감사했다. 이들 부부는 개그맨이 아마추어로 출발해 프로로서 자리를 잡고 방송의 한 축이 되는데 크게 기여를 한 공로자이다. 한국 개그의 품격을 높이고 후배들을 이끌며 열심히 코미디 연기에 정진해 온 두 사람이 한국 코미디 발전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한다. 

 “간혹 축의금을 갖고 오셨다가 결혼식 인사에 열중하시다 보면 접수하는 걸 깜박 잊고 그냥 가시는 분이 있습니다. 호주머니 뒤져 보고 아직 안내셨으면 즉시 갖다내시기 바랍니다. 이상은 국가생활안전공단에서 알려드리는 말씀입니다.”

 이 정도만 해도 됐을 걸, 좀 쇼킹하게 깜짝쇼를 할려고 "지금 막 이주일 선배님께서 신랑신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고 착한 일 많이 하라고 축의금 일천만원을 전해주셨습니다. 이주일 선배님께 박수 한 번 크게 보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조크로 바람을 잡은 건데 좀 심했다.


#. 당시 일천만원으로 땅을 사놨면 지금 얼마나 될까. 최소 1억~2억원은 훨씬넘는 재산이 됐을 것이다. 

김학래 선배는 이주일 회장이 경영하는 무랑루즈 초원의 집, 홀리데인 서울 업소에서 MC를 계속 봐왔다. 인기가 높았고 밤무대 고급 사회자로서 유명했다. 이주일 선배는 선후배들의 애경사를 반드시 챙겼으며 봉투에 상당히 많은 금액을 넣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후배사랑 나라사랑! 김학래 사랑 코미디 사랑입니다! 구호를 외치며 김학래, 이주일 두분의 사이가 특별관계라는 것을 강조하느라고 뻥튀기를 한 것이다. 

 다음날 신문에 보도가 되면서 난리가 났다. 공개적으로 그렇게 표시를 하면 서민들이 어떻게 보겠냐? 우리에게도 좀 줘라. 왜 김학래만 주냐. 개그맨들 돈잔치 하냐. 항의 전화를 많이 받았고 엄청 시달렸다고 했다. 하여튼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 김학래 임미숙 부부는 아파트 단지에서 의류사업, 강남에서 요식업, 미사리에서 카페 등 여러 사업을 벌였으나 악전고투 실패를 거듭하며 긴 세월을 고생했다. 마지막으로 임미숙의 임(린) 김학래의 김(찐)을 따서 린찐 중식당을 체육공원 근처에 차렸는데 단숨에 대박이 났다.

 그간의 고생과 노하우가 폭발했다. 일약 재벌그룹 못지 않게 승승장구 욱일승천의 기세로 서울의 명소를 만들었다. 외국 관광객들도 꽤 찾아온다. 가히 인간승리 인생역전이라 하겠다. 이번에도 스타답게 장안의 화재를 불러일으켰다. 화재? 얼마 전 소방차 20여 대가 출동하는 불이 났는데 다행히 조기에 진화했고 크게 보도되지 않았다. 곳곳에 산불로 걱정이 태산 같은데 공인이 주의를 안했네, 화재예방을 위한 교육이 어쩌고 식품위생법이 저쩌고 트집을 잡고 생떼를 쓰고 언론에 공격을 받으면 구설수에 휘말리고 일파만파로 한없이 꼬일 수 있다.


#. 연예인하기 쉽지 않은 참 어려운 사회다. 이러니 연예인의 생존율은 성공할 확률은 한없이 한없이 낮을 수밖에 없다. 김학래 선배와는 유머 1번지, 아침마당, 한마탕웃음으로 KBS 프로를 40여년 함께 하면서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을 상의해 왔다. 방송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던 회장님 우리 회장님 코너에서 '김 이사 딸랑딸랑'은 큰 유행어가 되었고, 유머 1번지를 통털어 코미디의 압권이었다. 이러한 인연도 꽤 드물 것이다. 한 번도 다투거나 의견이 엇갈린 적 없었다. 늘 고마운 절친이며 영원한 내편이라 믿는다. 현재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부위원장, 코미디언협회 이사를 맡아 선배를 존경하고 후배들을 이끌며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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