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광의 행복칼럼] 성찰과 자기관리
성찰과 자기관리가 얼마나 중요할까? 이것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스티브 파라(Steve Farra)는 <삶의 마지막까지 쓰임을 받는 하나님의 사람(Finishing Strong)>이라는 책에서 1945년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 세 전도자들, 즉 빌리 그래함, 척 템플턴, 브론 클리포드를 소개한다. 그에 의하면 빌리 그래함보다는 다른 두 사람이 더 유명하고 유능했지만 빌리 그래함을 제외한 두 사람은 성찰과 자기관리 부족으로 처절한 실패자가 되었다.
템플턴은 자기 인기를 믿고 라디오, 텔레비전 해설가와 신문 논설위원을 하겠다며 사역에서 떠났다. 그리고 곧 신앙도 포기하고 <안녕 하나님; 내가 기독교 신앙을 버린 이유>라는 책을 썼다. 또 바울 이후 가장 탁월한 설교자라는 찬사를 들었던 클리포드는 돈과 알코올 문제로 35세에 가족도, 사역도, 건강도 잃고, 허름한 여인숙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그가 죽자 주변의 목사님들이 돈을 모아 관을 준비해 빈민들을 위한 공동묘지에 안장했단다.
클리포드와 템플턴의 이야기는 미국 기독교 역사에 가장 슬픈 이야기 중에 하나다. 대단한 잠재력을 가졌던 젊은 사역자가 ‘성찰의 부족과 자기관리 실패’로 비참한 결말을 맞은 것이다. 성찰이 없으면 자기관리가 어렵다. 그래서 성찰은 매우 중요하다. 성찰은 자기 객관화를 통해 자신을 살피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거울이 필요하듯 모든 인생과 모든 사회는 성찰이 필요하다. 개인, 단체, 국가를 막론하고 성찰을 외면하면 퇴보와 패망의 길로 간다.
성찰은 기독교인들에게 친숙한 개념이다. 성찬식 때마다 읽는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라는 말씀에 자기를 살피는 것이 성찰이다. 성찰은 회개와 성숙에 필수요소다. 그래서 바울은 갈등을 겪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살피라고 거듭 촉구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서문에서 성찰을 강조했고 청교도들도 성찰을 경건의 덕목으로 삼았다. 신앙인의 성찰은 주님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개선하는 로마 황제에게 “당신은 인간이오”라는 말을 반복해 주는 철학자가 있었다. 신처럼 숭배받던 로마 황제에게 신이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하는 일종의 각성 장치였다. 조선시대 유학자 김성일은 ‘나의 잘못을 말하는 자가 나의 스승이고 나를 좋게 말하는 자는 나의 적’이라 했다. 이는 비판예찬론도 격려의 폄훼도 아니다. 성찰을 위한 비판의 유익을 강조한 것이다. 타인의 비판도 유익하지만, 주님 시선으로 자신을 성찰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성찰은 건강한 자기 객관화다. 성찰은 개인과 공동체의 행적을 정직하게 되짚어 자기수정을 이끌게 한다. 물론 성찰이 자기학대로 이어지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성찰은 파괴적인 자기비판이 아니다. 성찰은 미래지향적이고 생산적인 자기점검이다. 건강한 자기성찰은 건강한 자기관리를 낳는다. 그래서 성찰과 자기관리는 자신과 공동체의 발전과 성숙의 견인차다.
성찰의 계절, 가을 한복판을 지나고 있다. 이 가을에 겸손한 자기성찰을 통해 한 번 더 익어가기를 기도한다. 예수님께서 너희 중의 하나가 나를 팔리라 말씀하실 때 “내니이까?”라며 근심 어린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았던 제자들의 마음으로 하루하루 자신을 돌아보면 좋겠다. 나아가 주님의 시선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