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영수의 코미디 40년 연예비사 <31-1> 인생으로 울리고 음악으로 웃기는 서수남!
서수남 노래배움터에서 코디미언 엄영수(왼쪽)가 가수 서수남과 이야기를 하던 중 포즈를 취했다. /엄영수 제공
#. 준비된 서수남, 탈락이 성공이다
60년대 초, 가수 일자리는 많지 않았다. 워커힐호텔 쇼는 한국 최대의 쇼, 최고의 개런티가 보장되는 꿈의 무대였다. 서수남은 오랫동안 준비했기에 자신만만했다. Korea Brothers four 4중창단을 결성했고 아리랑 Brothers란 예명으로 오디션을 봤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리더였던 서수남만 탈락하고 서수남의 가르침을 받은 나머지 세 사람은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서수남의 키가 너무 커서 중창단의 balance(균형)를 깬다는 게 그 이유였다. 즉, 볼품이 없다나. 키가 커서 서수남은 혼자 남은 이산가족이 됐다. 그러나, 불합격이 서수남을 살렸다. 워커힐호텔 쇼에 들어 갔으면 무명 중창단의 일원으로서 일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서수남의 홀로서기가 시작됐고 무한한 재능을 발휘하게 된다. 우선팀에서 ¼만 받던 출연료를 버는대로 다 갖게 됐다. 이게 가장 큰 수확일지 모른다. 5·16 군사혁명 1주년 기념 MBC전국노래자랑 대회에 나갔다. 이런 대회면 어떠냐! 등용문 통과는 자주 들이대면 걸린다. 드디어 입상을 했다. 구경꾼 중에 가요전문가가 숨어 있었다. “삼각지 근처에 가면 미8군 쇼 용역제공 하청업체가 있다. 당신 정도 실력이면 충분하다. 빨리 뛰어가라, 뛰어 갓!"
#. 미국을 알면 귀족가수로 출발한다
쥬빌리밴드에 응시했다. 신청곡을 한 곡 듣더니 "노래 좋고, 발음 좋다."고 한다. 다음 곡은? 한 곡 더 불렀다. "물건이네, 끼가 있네." 또 불렀다. 다섯 곡을 듣더니 더 있냐고 묻는다. "60곡은 언제든지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고, 웨스턴 컨트리송 포크 팝송해서 200곡은 압니다." 키를 보면 미국인데 한국사람 맞아? “A급가수" 판정을 내리고 그 즉시 미 8군 쇼무대에 섰다.
8군 영내는 미국을 그대로 옮겨 놓은 곳이다. 수영장, 극장, 테니스장, 일류 레스토랑, 명품 면세점, 외국서적 전문점, 헬스장, 겜블, 호화 외국인 전문쇼장, 골프장 등. 5만명 미국병사를 위한 시설이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여기서 미국문화가 한국 전지역으로 급속히 퍼져 나가고 있었다.
출발부터 귀족가수였다. 문화예술에 대한 이해부족과 춥고 배고팠던 시절이다. 햄버거와 스테이크를 어려운 동료들에게 퍼날랐다. 2년간 열심히 뛰니 어머님께 큰 집을 사드릴수 있어 불효막심한 자식에서 효성 지극한 아들로 변신했다.
어머님은 홀로 2대 독자 외아들을 키우면서 평범하게 자라 좋은데 취직해서 잘 살기를 바라셨다. 미8군에서 일한다고 하니 대성통곡을 하시면서 열성을 다해 자식을 키웠는데 미군부대가 웬말이냐며 내가 무슨 죄를 졌길래 하늘에서 이런 벌을 내리시냐고 원망을 하셨다.
미군부대라면 기겁을 하시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극심한 거부반응을 보이실 때였다. 그때 어른들은 미국문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 가수 서수남 탄생은 신의 섭리라고?
집에 영문한글 혼용 타자기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호기심에 이 타자기를 치다보니 영어를 가까이 하게 됐다.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있었는데 아버님이 팝송을 즐겨 들으셨고 서수남은 오후 3~5시에 AFKN 컨트리송 전문 프로그램을 좋아했다. 200곡을 다운받아 노트를 만들었다.
중고생 때 벽장에 있던 기타가 눈에 띄었으며 책이나 음반 TV 속의 외국가수들을 보면 하나같이 기타를 매고 있다. 아! 가수를 할려면 기타를 쳐야하는구나. 가수생활 하다가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와서 방송에서 영어이름 퇴출, 팝송프로 축소 또는 폐지, 무분별한 외국어사용 규제, 정화운동이 벌어졌다. 여기에 맞대응하고 싸울 일이 아니다.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지혜가 필요했다. 번안가요를 만들기 시작했다. 모든 가사를 한국어로 바꿔서 더 멋있게 더 재미있게 더 아름답게 불렀다. 모든 노래가 원래 한국 노래인 것처럼 착각할 정도로 개사를 했다. 지금 살펴봐도 훌륭하다. 우리 입에 맞게 완벽하게 소통이 되도록 했다. 언어감각이 특출났다.
국문학을 했던 교육자 부모님 DNA가 몸 속 깊이 흐르고 있다는 증거다. 집안 전체가 특출난 가수를 키우기 위해 준비돼 있었다.
탁상 위에 타자기, 벽장 속의 기타, 책장 안에 팝송책이 왜 있겠나? 그냥 있는 게 아니다. 서수남식 음악의 탄생을 위한 신의 위대한 기획이였으리라! 더 중요한 것은 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노력한 서수남 자신이었다. 그의 명랑하고 유쾌하고 밝은 마음까지 입혀 놓으니 명곡이 탄생한다.
#. 대인 서수남의 인생은 지는 중!
서수남은 낙천적 희망적 긍정적 성격을 가진 분이다. 연예계에서 가까이 알고 지낸 40년간 언제나 싱글벙글 표정에 맑고 활기찬 목소리를 들려준다.
가수의 날을 맞아 'KBS가수 전국노래자랑' 이란 특집프로가 있었다. 사회는 송해 선생님, 아나운서 임수민이었고, 심사위원은 14명, 주로 작사 작곡 전문가들인데 코미디 쪽 엄영수, 여명808 남종현 회장도 있었다. 가수끼리 4명씩 대결을 시켜 예선 본선을 거쳐 승자를 가리는데 서수남이 원로 쪽 도전자로 출전했다. 원래 웃기는 가수지만 그날 더 웃꼈다.
텍사스 카우보이 복장에 빠른 템포로 여러 곡을 모아서 흥겨운 무대를 만들었다. 결과는 탈락이었다. 공정심사를 위해 최고점 최저점은 심사에서 빼고 중간 12명 것을 합산해서 했는데 왜 이런 결과가 나왔나? 영수 생각이다. 대본이 미리 나왔다. 심사위원이 거의 가요계 사람이다. 가수들은 전국방송에 나가 경연을 하니 탈락하는 것은 누구나 부담이 된다. 당연히 아는 유명 심사위원에게 인사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서수남은 그런 경우 아마도 후배에게 양보해 주려하지 않았을까? 심사위원석에 앉았던 내가 얼굴이 화끈거렸다. 시청자에게 너무 큰 죄를 졌다고 생각했다.
백전노장 원로가수 살아있는 전설 포크 팝 1세대 컨트리송 코믹송의 대가를 공개방송에서 이렇게 박대하다니 최근까지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번 칼럼 취재를 위해 인사를 드렸을 때 5년 전 일을 사과드렸다. "영수야 괜찮아. 넌 그걸 지금도 기억하냐? 니맘 알지. 난 결국은 지고 살아. 인생은 결국 지는 거 아니냐?"
맞다. 가을에 지는 낙엽이 너무 슬프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