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설악단풍(雪岳丹楓), 숲 속에서
대니얼 김
제너럴 컨트랙터
이상기후로 인한 변화 중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한국의 가을이 금새 지나갈 정도로 짧게 느껴지는 것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무덥던 여름이 가을 절기(節期)까지 연장되다 보니 정작 가을도 그만큼 짧아졌다.여차하면 단풍구경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을 정도다. 설악산 단풍을 보려고 주말 날씨를 보니 ‘때때로 비’라는 기상예보가 나와있다.
산(山)이란 쾌청한 날씨는 날씨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대로 정취가 다르다. 고르지 않은 날씨이지만 이번 기회를 놓치면 비바람에 단풍이 많이 지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아침 일찍 속초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등산객을 위해서인지 한계령, 오색, 양양 등을 경유한다. 당초 계획은 한계령에서 하차해 산림보호 안식기간 후 7년만에 개방한다는 흘림골을 거쳐 주전골, 오색약수 쪽으로 하산하는 코스였다.
버스가 한계령에 도착했다. 산 언저리가 심한 안개로 시야도 흐릿하고 비바람까지 동반했다. 그래서 비도 그치고 기상도 나아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 속에 속초를 거쳐 설악동으로 들어가는 걸로 코스를 바꿨다. 설악동에 도착하니 비 온 끝이라 설악산 초입의 계곡에는 물소리가 우렁찼다. 신흥사를 지나 비선대 숲길로 향했다. 어느 새 상수리나무, 물푸레나무 등 키 큰 나무들은 나목(裸木)으로 변해있었다.
굵은 나무 몸체와 줄기들이 검은 색 선(線)으로 서 있다. 그 사이로 붉은 당단풍과 노란색 단풍잎들이 비온 후의 선명한 자태로 군락을 이루고 있다. 단풍(丹楓)은 나뭇잎 지고 난 후의 검은 나목사이에서 다양한 색의 대비를 나타냈다. 여러 수종의 나무들이 색상과 명도(明度) 차이로 인한 원근감을 나타낸다. 숲은 바람소리, 물소리, 새의 지저귐까지 어우러져 마치 오케스트라 연주회의 스테이지 같기도 했다.
1.5마일 정도의 비선대로 오르는 숲길은 숲의 원형(源形)을 보여준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각거리는 마사토 흙의 감촉도 상쾌하다. 숲으로부터 산란된 빛이 산책하는 사람들의 얼굴에 투사되면서 사람들의 얼굴도 옅은 단풍색으로 채색되는 듯 하다. 나무들 밑에는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중학교 시절,생물 시간 중 학습했던 단원 중에 기억되는 것이 있다.
‘떨켜’다. 떨켜는 낙엽지는 과정의 하나다. 낙엽은 나무가 살아가는 하나의 전략이다. 나뭇잎은 봄부터 가을까지 부지런히 생산활동을 하지만 가을을 지나 겨울을 나는 동안은 주로 소비활동만 하게된다. 나무들은 새 봄을 맞이할 때까지 효율적인 생존을 위하여 나뭇잎을 털어낸다. 떨켜는 나무 생존의 필수요소인 셈이다.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숲, 그 안에서 벌어지는 생명의 탄생과 소멸, 부활을 짚어낸 책이 있다.
일부를 이어본다. "가을은 겨울을 준비하라는 관용이다. 숲에서 여름이 사라지는 것은 썰물이 빠져나가는 듯 휑하고 빠르다. 삶의 치열함이 물러간 숲은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가을은 다가올 겨울을 대비하기 위한 조정기간이다. 나무는 잎을 정리하고 짐승들은 먹이를 준비해야 한다. 헐거워진 숲을 통과한 빛은 짧은 가을 동안 새로운 희망이 되기도 한다. 여름 끝에 가을이 없었다면 자연은 훨씬 혹독하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왕성한 생장을 도모했던 세포 속의 물질들은 분해되고 정리된다. 물질들은 세포 속을 슬금슬금 빠져나와 새로운 저장소로 이동한다. 살이 녹아난 나뭇잎은 얇고 투명해진다. 빛이 서서히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사이 하늘은 더욱 하늘답게, 단풍은 더욱 단풍답게 물드는 것이다. 세포 사이로 스며든 빛은 나뭇잎 색을 그대로 재현해낸다. 기억해 보라, 봄에는 세포에 충만했던 물기가 빛을 산란시켰다.당단풍을 통과한 빛은 진홍빛으로 물들고 붉은나무를 통과한 빛은 노을빛으로 물든다. 바람이 잎을 들어올려 빛이 쏟아질 때는 노을보다 더 붉은 햇살이 된다. 가을 빛은 지구가 얼마나 아름다운 빛의 행성인가를 보여주고있다.” (숲의 생활사, 142쪽, 차윤정 著, 2004).
하산하면서 떠오르는 말이 있다. '숲은 사람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사람은 숲 없이 살 수 없다’는 말이다.새삼 자연의 이치와 순리, 그리고 숲의 위대함이 다가온다. 설악동 C주차장 옆 개울 건너 2마일 정도 가면 ‘학사평’ 마을이 나온다. 알칼리성 ‘척산온천’이 자리잡고 있다. 샤워하면서 벽 윗쪽 창 밖을 올려다 본다. 설악산 능선이 장엄하다. 온천 앞 마당에 서 있는 감나무 꼭대기, 까치밥으로 남겨 놓은 너댓 개의 붉은 감이 저무는 가을을 배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