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영수의 코미디 40년 연예비사<18> 브라질 이민 30주년 기념 위문공연
무궁화축구단 기념촬영(위). 엄영수와 남궁진 전 문체부장관. /엄영수 제공
#. 출발의 아픔
1990년 1월. 브라질 이민 30주년 기념 한국동포 위문공연단 60여 명이 브라질 바스프 항공기를 타고 김포공항에서 상파울루공항을 향해 출발했다. 무궁화축구단 이덕화, 임채무, 최병서, 김한국, 한무, 김성남, 임형규, 견미리, 이상운, 이기철, 이규혁, 김한일, 황기순, 이용근, 방일수, 김명덕, 백남봉, 남보원, 신광철 등. 그리고, KBS '남극의 설' 출연자 현인, 최희준, 설운도, 김국환, 엄영수, 주현미, 체리보이, 제작팀 스태프와 김영렬 총감독까지 해외 위문공연 역사상 가장 많은 연예인으로 구성됐다.
브라질에 2주 간 머물면서 우리동포들과 골프, 축구, 디너쇼, 위문공연을 함께 하며 녹화 프로그램 설 명절특집 '남극의 설' 은 KBS1 TV를 통해 방송한다. 이과수폭포, 코파카바나해변, 예수그리스도 동상, 이타이프댐, 리우 케이블카 관광도 함께 진행한다.
김포공항-> LA공항-> 브라질리아공항-> 상파울루공항-> 리우데자네이루까지 비행시간만 30여 시간 날아가야 도착하는 멀고 긴 여행이다. 출발부터 안타깝고 특이한 일도 있었다. 무궁화축구단 주장 이덕화는 TV드라마 '사랑과 진실' 국내 녹화일정 때문에 목적지에 도착하면 다음날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즉시 귀국해야 한다. 가고 오는 것 밖에 없는 반쪽짜리 여행이었다. 비행기를 타는 사람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한국예총 산하 연예협회 석현 이사장은 동포들에게 좀 더 많은 즐거움을 주기 위해 갈 수 있는 최대 인원 최고 인기인을 모두 동원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동포들이 가장 보고 싶어하고 특별주문한 이덕화를 비행기에 태우기 위해 별수단을 다 썼다고 그간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브라질 이민 역사 30년! 대부분의 동포들은 열악한 환경을 잘 극복하고 의류, 농가공 사업등 다양한 업종에 진출하여 열심히 일하고 있다. 항상 고국이 그립고 누구라도 관심을 갖고 찾아와 주기를 기대하지만 결코 쉽지 않다.
이주일 단장의 무궁화축구단이 해외 원정경기를 통한 봉사와 나눔실천을 기획하여 LA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를 선정, 이번 행사가 이뤄졌다. 연기자들 개개인의 일정으로 인하여 부득이 불참하게 되는 경우, 톱스타들의 거취가 전체에 큰 영항을 미친다. 그래서 이덕화의 동행은 연예사에 길이 남을 일이다.
이주일 선배를 비롯한 몇 분의 스타가 함께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브라질 동포 여러분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좌석에 앉고 보니 스타 이덕화 바로 옆좌석이다. 비행시간이 길어 지루하고 힘들테니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편히 가라고 특별히 배려해 준 것 같다.
#. 이덕화를 말한다
1982년 초여름께 연예인 낚시대회가 열렸다. 대회장은 이덕화였다. 참가자 회비는 3만원. 탤런트, 영화배우, 가수, 성우, 코미디언 등 수백명이 모였다. 접수계원에게 회비를 냈더니 이덕화가 말렸다. “엄영수 넌 면제야. 니가 무슨 돈이 있냐, 신인은 완전 면제.” 낸 회비를 되돌려 주었다.
청춘만세 MBC TV 코미디 프로그램 1회 녹화 출연료가 2만원일 때였으니까 3만원이면 지금 30만원 넘는 금액쯤 될까. 그때 내겐 큰 돈이었다. 진짜 고마웠다. 그 낚시대회장에 나를 알아서 내게 그렇게 베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춥고 배고픈 시절의 사연이다.
영화배우 장동휘, 가수 박상규 등 선배 스타들이 한쪽 그늘에서 고스톱을 쳤다. 잘나가는 어떤 코미디언 선배가 내게 돈을 빌려 달라고 해서 할 수 없이 빌려줬다. 33년이 흘렀다. 지금까지 갚지 않고 있다. 하도 오래 돼서 이제는 누군지 잊어버렸다. 어차피 알고 있어도 못 받기는 마찬가지니까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해야 하나?
디스코춤의 전국적 유행으로 디스코텍이 사방천지에 마구 생겨날 때였다. 회현동 작은 호텔 안에 있는 디스코텍을 이덕화가 인수했다. MBC라디오 임국희의 여성싸롱 진행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라디오국 식구들은 이덕화 디스코텍을 자주 이용했다. 단체 회식 때는 물론 개인적으로도 젊을 때였으니 나도 자주 들렀다. 계산은 이덕화 스타가 거의 해결했다.
그때 신세 많이 졌는데 나중에 미안하고 정말 난감한 일이 벌어졌다. 얼마 못 가서 이덕화 디스코텍이 큰 손해를 보고 문을 닫았다. 세상에 이런 일이…. 스타의 망신일 수 있다.
얼마 후 강남에 Much More(머치모어) 최신식 초대형 디스코텍이 호화롭게 개업했다. 장안의 돈을 갈퀴로 긁어 돈자루에 마구 퍼 담는다는 소문이 났다. 여기에 DJ가 이덕화였다. 누구도 예상못한 파격적 출연이었다. 최고의 탤런트가 완전 변신했다. 인기로 하는 게 아니라 실력있는 명품 DJ였다. 한국 DJ 최고의 출연료를 받았다. 지난 번 실패한 디스코텍은 투자였다. DJ들의 DJ쇼를 배운 것이다. 연기의 천재들은 다른 사람의 연기를 빨리 배운다. 그리고 가르쳐 준 사람보다 훨씬 잘한다. 망해서 문 닫은 업소 비용보다 몇 십 배의 수익을 올렸다.
개런티가 별도로 있는 것도 아니고 역사에 기록되는 일도 아니다. 순전히 자원봉사고 늘 있는 위문공연일 뿐이다. 차라리 오지 않았어야 했나. 멀고 먼 길을 힘들여 와서 겨우 인사만 올리고 돌아간다는 것은 보내는 사람이나 돌아가는 사람이나 아쉽고 서운함이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감동적이다. 공연하고 가는 것보다 더 찐한 울림을 남긴다. 이덕화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 가슴뭉클한 사연을 만들고 돌아서는 이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다. 인생은 항상 다음이 더 흥미를 준다. 내일부터는 다음이 다가옴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덕화는 1952년 생 용띠다. 나와는 '갑장'이다. 1972년 데뷔했으니 51년차 배우다. 하이틴 스타, 청춘스타, 사극스타, MC스타, 국민스타 등 스타란 스타는 다했다.
1977년 오토바이와 버스 충돌사고, 1990년 지프와 버스 충돌사고, 1996년 국회의원선거 낙선까지, 세 번의 큰 사고가 있었으나 모두 잘 극복했다.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으며 사고 후에 더 좋은 일이 많이 생겼다. 사고는 늘 있다. 어떻게 헤쳐 나가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온다.
좌석에 앉은 이덕화는 계속 잠을 잤다. 그 동안 국내에서 일정이 무척 많았던 것 같다. 부지런하고 윗사람에게 예의를 다하는 성격이라 남의 애경사 일일이 챙기려면 어지간히 뛰었을 것이다.
#. 선거패배 인간승리
남궁진(전 문체부장관, 국회의원)의 회고다. "지난 12년 동안 우리는 전패했어요." 단 한 번 조세형 총재 권한대행이 보궐선거를 이겼는데 결국 김대중 총재가 이긴 셈이지요. 여기서 힌트를 얻었어요. 이 선거는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총재의 대리전이다. '이덕화 대 남궁진'으론 안 되고, 김영삼 대 김대중으로 갔죠. 나는 오직 김대중 총재의 비서였을 뿐이예요. 국민스타 이덕화씨를 존경합니다. 선전에 감사하고 위로의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후회가 돼요."
남궁진의 계속된 이야기다. "방송국 출구조사결과 지는 걸로 나와서 소주 마시고 집에 가서 잤어요. 새벽 1시에 데릴러들 왔어요, 역전할지도 모른다고 내 친구 장우(팝·재즈가수·음악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남궁진 내 친구입니다. 그 애는 참 불쌍한 앱니다. 하필이면 이덕화가 광명으로 출마를 했으니, 내친구 어떻게 합니까? 이거 큰일났습니다.'"
여론조사, 유세장 분위기 청중동원 능력, 조직, 인맥, 자금, 언론의 관심. 남궁 진이 앞설 것이 한 가지도 없었다. 이덕화는 연설도 일품이었다. 연기와 마찬가지로 젊고 힘있고 신뢰감을 준다. 이덕화는 특히 여성팬이 많았다. 어머니들이 유세장마다 몰려나와 대대적인 응원을 펼쳐준다. 이 도시에 여성 자원봉사자가 갑자기 많아졌다.
집집마다 이덕화 쏠림현상이 생겼다. 사인을 받았다. 사진을 찍었다. 통화를 했다. 조용히 살림하고 집 지키던 가정주부들이 유세장에 가느라고 정신없이 뛰쳐나간다. 남자들은 신경이 거슬린다. 눈이 있으니 보이고 귀가 있으니 들린다. 이 동네가 왜 갑자기 이렇게 됐을까 생각해 보니, 이덕화가 나타났다. 이덕화 광명천지가 됐다. 남자들은 다 똑같다. 이심전심이다.
자존심 상한다. 말 없이 행동에 나선다. 투표로 표시한다. 부인이나 여성에 반하는 투표를 하고 싶다. 승부가 결정났다. 제15대 국회의원선거 이덕화 24405표, 남궁진 25852표 1447표차로 남궁진 당선 이덕화는 무인도에서 3년 간 공백기를 갖고 자기성찰로 삶의 폭을 넓혔다. 팬들은 마음 아파했고 열열한 사랑을 보냈다.
연기는 강해지고 섬세해졌다. 드라마와 CF가 물밀 듯이 덮쳤다. 무조건 저지르고 볼 일이다. 몸만 성하면 정신만 있으면 된다. 상처는 아문다. 더 큰 예술인이 되었다. 때로는 약한 척 죽은 척 하는 가짜 연기도 필요하다. 지나보고 아는것이지 실전에서는 한 표가 급하다. 진실만을 갖고 평생을 살아온 이덕화로서는 새로운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