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유산(遊山)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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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유산(遊山)하세요

웹마스터

김희식

(주)건축사무소 광장 상무


업무차 장흥에서 두 해 살기를 작정하고 주말이면 근처의 산들을 돌아보리라 계획을 세운지도 몇 달이

지났습니다. 천관산, 두륜산, 제암산, 일림산, 삼비산, 억불산, 상황봉(완도) 등이 그간의 행보였죠. 지난 주, 인근 영암의 국립공원 월출산 천황봉(807M)을 다녀왔습니다. 


산행 들머리 입구에 ‘영암아리랑’ 노래비가 서 있습니다. ‘달이 뜬다 달이 뜬다/영암 고을에 둥근 달이 뜬다/월출산 천황봉에 보름달이 뜬다/아리랑 동동 스리랑 동동/에헤야 데야 어사와 데야/달을 보는 아리랑/님보는 아리랑….’(이환의 작사, 고봉산 작곡·하춘화 노래). 노랫말 가운데 후렴 추임새가 흥겹습니다. 


암반으로 된 산길로 접어들자 단풍 들기도 전에 떨어진 낙엽들이 수북했습니다. 백두대간이나 해외 산들을 섭렵한 등산덕후들에게는 깜냥도 안되는 필자의 산행 편력이지만, 산과 관련된 기억들이 있습니다.


맨 처음 산행은 고교 2년 때 동급생, 선배들과 같이 올랐던 북한산이었죠. 기능성 등산복이나 장비도 드물던 때, 한 겨울에 군용점퍼(검정색으로 물들인)와 군화를 신고 갔던 걸로 기억됩니다. 해마다 천리행군, 한미연합 산악특수전 등의 훈련으로 입대 후에는 험한 산들을 다녔습니다.


‘CH-치누크’ ‘123’ 등 훈련용 전투기종에 탑승, 투하지점은 무주, 장계지역 덕유산이나 함양쪽 지리산 등 험준한 산들이었습니다. 칠흙같은 한밤 중 산등성이에 투하되면 뛰어내린 등판의 낙하산을 해체·수거하느라 애를 먹기도 했지만, 산에 대한 추억 중 빼놓을 수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오리건주 컬럼비아 강변 마운틴 후드, 요세미티 언저리, 콜로라도 그랜드 정션 주변의 산들도 잊을 수 없는 곳들이죠. 


제대 후, 직장 내 그룹산행, 일반 산악회 등을 통해서도 꽤나 여러 곳의 산들을 다녔습니다만, 얼마 전부터는 산을 오른다는 것이 무료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산이 주는 무료함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 준 두 권의 책을 만났습니다. 


첫 번째는 작가 심산의 책입니다. 자신이 한참 종주산행에 빠져 있을 때 산은 그저 능선으로만 파악되었고, 암벽등반에 빠져있을 때 산은 오직 바위벽으로만 여겼답니다. 그런 그에게 산이 어느 날 갑자기 더 이상 집채만한 배낭을 짊어지고 일어설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무상하게 다가왔다고 고백하더군요. 언뜻 이제는 산을 떠나야겠다는 순간을 맞이한 그에게 뜻밖의 동기부여가 생겼습니다. 다름아닌 ‘유산여독서(遊山如讀書)-산에 오르는 것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는 퇴계의 한시(漢詩)가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독서가 유산(遊山)과 같다 하지만/이제 보니 유산이야말로 독서와 비슷하네/공력이 다하면/원래 스스로 내려오고/얕고 깊음을 아는 것/모두 이로부터 말미암네/앉아서 구름 이는 것 보면/묘리를 알게 되고/걸어서 근원에 닿아야 비로소 처음을 깨닫네/정상에 오르려 노력하는 그대들이여/늙고 쇄잔하여 중도에 그친 내가 깊이 부끄럽네.”(퇴계의 시,우리말 全文).


아울러 퇴계보다 42년 늦게 태어난 중국의 시인 정구(鄭毬)의 한시도 심산의 마음을 산으로 향하게 했지요. “산에 반도 오르지 못하고 그치는 자가 있고/많이 돌아 다녀도 산의 정취를 모르는 자가 있네/반드시 그 산수의 정취를 알아야/비로소 산에서 노닐었다 할 수 있으리.”(산과 역사가 만나는 인문산행 中에서,심산 著, 2019). 단순한 산행을 벗어나 인문학적인 공간으로 산을 바라 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작가 심산. 


두 번째 책은 소설가 이병주 선생의 글입니다. “높은 산을 등반한 사람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모두 철인(哲人)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그 눈빛엔 성스런 것이 깃들어 있다. 보통 사람들은 절대 볼 수 없는 것을 보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겪어보지 못한 기온과 풍설을 겪었기 때문이다. 지구 위에 가장 높은 곳에 선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높은 곳에 섰다는 단순한 의미만이 아니다. 그 높은 곳으로 밀어올린 정신과 능력으로 해서 인간적으로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곳에 섰다는 얘기도 된다.”(다시 산을 생각한다, 이병주, 2010).


위의 두 권의 책을 읽고나서 제게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퇴계 선생의 ‘유산여독서((遊山如讀書), 산에 오르는 것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는 말씀과 이병주 선생의 ‘산 오르내리는 등반자는 철인(哲人)이다. 강인(强靭)함이 깃들어 있다’라는 글이 제게도 山과 겹쳐져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공부는 돌이킬 수 없는 변화라고 했던가요. 독서나 유산(遊山)도 마찬가지 변화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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