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광의 기독교 인문학] 전도자 C.S. 루이스의 대중 전도
C.S. 루이스를 연구한 학자와 그의 전기작가들은 한결같이 그를‘전도자(傳道者)’라고 부른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루이스는 서적을 통해 복음을 전했고 지금도 그의 책들이 여전히 복음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루이스는 전 생애에 걸쳐 자신의 성격적 한계를 극복하고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대중 전도 활동을 했다.
루이스는 전도할 기회가 있으면 거부하지 않았다. 자신이 전도의 은사가 없다는 것을 자주 말했고, 소극적 성격 때문에 개인 전도를 거의 못했음에도 그랬다. 하지만 전도의 기회를 얻으면 의무감으로 수락했다. 소크라테스 클럽의 회장을 맡아 성실하게 복음을 전하며 불신자들과 소통한 것도 이런 의무감 때문이었다.
C.S. 루이스가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했던 것은 세 번이다. 당시 연재하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가 세간의 주목을 받는 것이 계기가 되어 영국 공군 군종감이 루이스에게 공군부대에서 기독교에 대해 강연을 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루이스는 전시에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라고 생각하고 부대 강연을 수락했다.
1941년 5월 루이스는 공군부대 강연을 마친 후 친구인 페넬로페 수녀에게 “공군부대에서 강연했는데, 완전히 실패한 것 같습니다”라고 편지했다. 반면에 당시 공군부대의 현역 군종 목사였던 A.W. 고드윈 허드슨 감독(Bishop A.W. Godwin-Hudson)은“대 성공이었다!”라고 자기 아내에게 소식을 전했다. 이런 평가 때문에 루이스는 전쟁 기간에 공군부대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다.
공군 전도를 시작하기 전 1941년 2월 루이스는 BBC 방송국 종교방송국장 J.W. 웰치 목사의 편지를 받았다. 웰치 목사는 당시 루이스가 내놓은 책 <고통의 문제>에 출판을 축하하면서 BBC 종교 방송 진행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BBC 방송국은 다양한 견지에서 건강한 기독교 방송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BBC 방송국이 폭격을 당할 만큼 전황은 심각했고 영국 국민은 불안에 떨었기에 백성들에게 신앙적 확신과 위로가 필요했다. 아울러 당시 영국군 신병을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부활절 의미를 아는 신병은 23퍼센트에 불과했다. 전시 장병에게 신앙은 매우 중요했고 장병 선교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1941년 8월 6일 수요일 저녁 7시 45분부터 15분간 첫 방송 강연을 했다. 기독교 방송국 국장 웰치 목사, 부국장 에릭 펜 목사와 긴밀하게 협조하면서 진행했던 이 방송 강연은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루이스는 청취자들로부터 많은 편지를 받았고, 방송 직후 강의 원고를 세 권으로 발간했는데 날개 돋친 듯이 팔렸고, 합본으로 발행한 <순전한 기독교>는 지금도 사랑 받는 베스트 셀러다.
루이스는 또한 옥스퍼드 대학교 기독학생회(OICCU) 책임자였던 엘리자베스 캐터우드(Elizabeth Catherwood/마틴 로이드 존스목사의 딸)의 초청으로 옥스퍼드 대학교 기독학생회에서“기독교는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이 강의 또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많은 결신자를 얻었다고 한다.
루이스는 거듭나면서 전도를 사명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 전도했다. 그는 평소 스스로 전도에 은사가 없다고 생각했고 성격도 소심해 개인전도를 못했다. 그런 그였지만 전도에 대한 사명과 부담을 품고 기회가 오면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전도 결실은 엄청났다. 전도 열기가 식어버린 이 시대에 C.S. 루이스의 전도 열정이 더욱 부럽기만 하다.